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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과 오락당 五樂堂 전통과 얼을 품은 집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합한 말이다. 경상도慶尙道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라면, 전주는 경주와 같은 비중이 있는 도시다. 고대국가에서 도읍지가 될 만한 여러가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지명에 온전 전全자가 들어간 것도 이런 각도에서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의 한옥을 새롭게 보수한 오락당 전경. 

전주 주변에는 김제와 만경 같은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쌀이 풍부한 지역이었으니 한 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배고플 확률이 적은 도시였다. 서해안의 해산물도 만경강과 전주천을 통해 배로 운반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전주의 남쪽은 산악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 위치한 진안, 남원, 임실의 산골에서 생산하는 땔감과 약초, 산나물 등이 전주로 들어왔으니 먹고살기에 좋고 풍요로웠다. 문화의 발전은 식후사食後事라고 했던가! 한반도에서 가장 먹을 것이 풍부하던 전주에서 예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날까지 남아 있는 음식, 판소리, 그림, 서예, 한지는 조선시대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문화이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이러한 전통 문화와 예술이 남아 있다.

1 돌담길 사이로 7백여 채의 한옥이 밀집되어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는 전주 한옥마을. 
2 학인당 지척에 위치한 오락당의 소박한 입구. 

학자와 도인을 낳는 풍수
전주 한옥마을에는 한옥이 대략 7백여 채가 밀집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전주의 부자들이 옮겨와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동네이다. 일본인 거주 지역과는 다른 구역이었다. 이 동네는 풍수가 좋다.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麟峰이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린봉’이란 이름은 전국에서 흔하지 않다. 고대에 은나라와 주나라가 전쟁을 할 때 은나라 군대를 지휘하던 국사가 문태사였다고 하는데, 이 문태사가 타고 다닌 신수가 바로 기린이었다고 한다. 기린은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기린이 아니다. 이마에 뿔이 하나 달린 신수이다. 문태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도교의 <옥추경>은 뇌성벽력雷聲霹靂을 신으로 섬기는 경전이다.

주로 귀신을 쫓는 주문으로 많이 암송하는데, 이 <옥추경>의 앞 장에 보면 문태사가 하늘에서 기린을 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주의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는 기린봉은 이러한 동이족 시원의 신화적 맥락을 품고 있는 이름이다. 더군다나 이 기린봉은 붓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바로 문필봉의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중바위’라고 불리는 승암산도 바로 한옥마을 남쪽에 있다. 이 승암산은 ‘호승예불 胡僧禮佛’이다. 서역에서 온 승려가 예불하는 형상이다. 이곳 한옥마을에서 학자와 도인이 많이 나온다고 여겼기에 전주의 부자들이 1930년대에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은 것이다. 승암산 밑의 바위 절벽 쪽으로 전주천이 흘러와 부딪치면서 내려간다. 이 냇물이 암벽에 부딪치는 지점에 한벽루가 있다.

물과 바위는 상극이면서도 둘이 만났을 때 기묘한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이성계의 절친한 친구인 최월당은 이성계가 왕이 되어 벼슬을 권유했어도 부모 봉양을 위해 이를 사양하고 고향의 바위 절벽 위에 정자를 지어놓고 한 세월을 보냈다. 그게 바로 한벽루이다. 한벽루에서는 전주천의 물이 바위 절벽에 부딪치면서 품어내는 안개가 일품이다. 물이라는 부드러움과 바위라는 강함이 부딪쳐 물 기운과 바위의 불기운이 응어리진다. 이런 곳에서 머무르면 건강에 좋고, 영혼이 고양된다. 한옥마을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는 원래 이 한벽루였다. 

3 담장 너머로 승암산의 숲이 내다보이는 오락당의 누마루. 
4 전주 한옥마을 초입에 자리한 오목대는 한옥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전통과 현대가 배합된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은 개성이 있다.넓이가 대략 가로세로 1.5km로, 한옥이 7백여 채가 넘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서 깊은 건물과 문화재가 많다. 우선 이성계의 위패를 모셔놓은 경기전이 있다. 조선 왕조 창업주의 위패를 모셔놓았기 때문에 전殿 자가 들어간다. 전주가 이씨 왕조의 발상지라는 의미이다.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이 경기전은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서울을 빼고는 다른 지역에는 없는 건축물이다. 한옥마을 안에 있는 경기전의 규모만 해도 1만 평이 넘는다. 향교도 있는데, 다른 지역의 향교와 비교해 규모가 아주 넓다. 서울의 성균관 다음으로 크고 오래된 향교이다. 한옥마을 내에는 오목대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남원에서 왜구와 싸워 승리한 후에 고향에 들러 전승 잔치를 벌인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 오목대에 올라가면 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한옥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한다.

가톨릭의 전동성당도 볼만하다. 서울의 명동성당 다음으로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성당이 경기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기와집이 늘어선 한옥 마을에서 서양식의 빨간 벽돌과 높이 솟은 십자가가 있는 1백여 년 역사의 성당 건물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유적지를 품고 있기에 전주 한옥마을은 서울의 인사동, 북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비교했을 때 그 면적이 훨씬 넓다. 한옥마을을 둘러보려면 1박 2일은 걸린다. 서너 시간 만에 다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최근 인사동이 화랑과 같은 문화 공간은 줄어들고 기념품 가게와 식당 같은 상업 공간으로 변모하는 추세인 데 비해 한옥마을은 상업적 냄새가 훨씬 덜하다. 주거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민박집도 대략 2백여 군데가 넘지만, 민박을 하지 않고 예전부터 살아온 보통 가정집도 많다.

인사동에 비해 상업 공간의 비율이 적다는 점이 한옥마을의 안정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전주는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동학군이 나주는 점령하지 못했지만, 전주성은 점령했다. 그래서 전라도에서 양반 상놈의 계급이 가장 먼저 무너진 곳이다. 그 농민 혁명의 의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한옥마을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전주가 조선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조선 왕조의 계급 차별을 가장 먼저 철폐하려 한 동학 농민 혁명의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오락당의 마당에는 흙을 마음껏 밟을 수 있도록 잔디를 깔고 작은 꽃을 심은 화단을 조성했다.

호남 예인들의 살롱, 학인당 
한옥마을에서 볼만한 한옥이 학인당 學忍堂이다. 1900년대 초에 지은 이 한옥은 판소리 공연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미국의 재즈가 목화 농장이 많던 뉴올리언스에서 시작해 공업 도시인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올라갔듯이 판소리도 비슷하다. 남원에서 시작해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다. 전주의 판소리 공연 대회가 바로 ‘대사습놀이’이다. 이 대사습놀이에서 소리꾼을 선발해 한양의 운현궁으로 올려 보냈다. 운현궁에는 판소리 애호가인 대원군이 살고 있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 왕조가 망하자, 대사습놀이는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관에서 주도한 이 행사가 전주의 민간단체로 넘어갔다. 전주의 유지들이 의견을 모아 전주의 부잣집이던 학인당에서 대사습놀이를 주최하기로 했다. 

학인당은 특수한 집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소리꾼을 비롯해 호남의 예인들이 모이는 집회장이자 살롱이었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곳이었다. 중인 출신인 학인당의 주인 인재 백낙중은 당대 호남의 부자였는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거액을 후원하기도 했다. 동학 농민 혁명군이 전주를 점령했을 때도 백낙중이 학인당에서 양반과 평민을 중재해 살생을 줄일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학인당 건물의 안채는 당시 사랑채가 아니었고 판소리 공연을 위해 지은 전용 공간이었다. 판소리 공연을 위해서 한옥을 이층집 높이로 지었고, 문만 떼어내면 방 여러 개를 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많은 사람이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인데, 1백여 명가량이 앉아서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루 주변에 서서 들을 수 있는 사람까지 합하면 2백~3백명을 수용하는 극장이었다고나 할까. 1907~1908년 무렵에 지은 이 학인당이 한옥마을의 핵심이다. 

1 방 두 개가 거실을 중심으로 마주 보고 위치한 오락당 내부. 
2 누마루를 완충 지대로 마당의 자연과 집 내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한옥의 최대 매력이다. 

다섯 가지 즐거움이 있는 한옥 
내가 살고 있는 한옥 오락당은 학인당에서 가깝다. 원래는 대지가 3천 평인 학인당에 속한 집터로서, 백낙 중의 작은아들이 살던 집터였다고 한다. 한옥은 나무로 지은 집이다. 거기에다 핸드메이드이다. 목수가 손으로 만들었으니 집주인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집이다. 나무는 손으로 만지면 촉감이 좋고,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좋다. 나무 냄새는 인간이 수십만 년 동안 맡아온 냄새이고,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에서 나던 냄새이므로 세포에 각인된 냄새인 것이다. 세포에 각인된 냄새와 기억을 마주하면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다. 세포에 기억되지 않은 것은 긴장이 된다. 

한옥에 살아보니 제일 먼저 이 나무 냄새가 좋다. 그다음으로는 마당인데, 한옥에는 흙을 밟을 수 있는 마당이 있다. 대지 70평에 건평은 20평, 방 두 개에 가운데 거실이 있고, 밖으로 자그마한 누마루가 있는 구조다. 마당에 잔디를 깔고 화단에 작은 꽃들을 심어놓았다. 나무로 만든 대문안으로 들어서 이 마당을 통과해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선다. 이 과정이 즐겁다. 아파트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동선이다. 한옥은 누마루가 있어야 한다. 누마루는 방과 마당 사이의 완충지대다. 늦봄의 저녁에 누마루에 앉아 있으면 담장 너머로 승암산의 숲이 보인다. 한벽루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승암산 꼭대기를 감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다.

여름밤에 손님과 함께 누마루에 앉아서 수박을 쪼개 먹으면 그 맛 또한 남다르다. 누마루와 수박이 궁합이 잘 맞다는 것을 한옥에 살면서 알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물이 홈통을 타고 잔디밭 마당으로 흘러내리는 모습, 비가 화단에 떨어지면서 꽃들을 싱싱하게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작은방에는 아궁이도 설치했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장작을 때고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면 이 또한 살 만하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누워 있으면 왠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천년이 넘게 우리 조상들이 누워서 피로를 풀고, 삶을 설계하고, 인생의 유한함을 느끼던 공간이 이한지 장판 온돌방 아닌가. 새로 집을 지으면서 당호를 ‘오락당五樂堂’이라고 붙였다. 다섯 가지 낙이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승암산 운무를 바라보는 낙, 온돌방에서 등짝 지지는 낙, 비 오는 날 마당에 떨어지는 빗물 보는 낙, 아궁이에 장작불 때는 낙, 친구와 누마루에서 차 마시는 낙이다. 인생은 낙이 있어야 한다. 


해설과 함께하는 전주 한옥마을 투어

한옥마을 정기 투어
일정 평일 14:00, 주말과 공휴일 10:00, 13:00, 15:00
출발 장소 오목대 관광안내소 앞 집결(별도 신청 없이 10분 전 인원 점검 후 정시 출발)
코스1 술박물관-지담길(공예공방촌 지담)-한옥 생활 체험관- 6백 년 은행나무-최명희 문학관-전동성당-오목대 관광안내소
코스2 오목대-양사재-장현식 고택, 동헌-전주향교-한벽루-남천교- 강암서예관-공예품 전시관-오목대 관광안내소

경기전 정기 투어
일정 매일 11:00, 14:00. 16:00
출발 장소 경기전 앞 집결

경기전 외국어 정기 투어
일정 영어(매일), 일본어와 중국어(주말) 11:00, 14:00
출발 장소 경기전 앞 집결
문의 063-281-5046, hanok.jeon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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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동양학자, 칼럼니스트) | 담당 신진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