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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속의 집, 시경루時境樓 공간을 바꾸니 인생이 바뀌더라
건축이란 단지 건물 신축에만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집주인의 생활 리듬과 감성에 주안점을 두고 공간을 재구성한 삼성동의 펜트하우스. 막힌 벽은 열고, 열린 창은 닫았을 뿐인데 공허하던 공간에 평화와 온기, 사람과 웃음이 깃든다. 이쯤되면 새로 짓지 말고 바꿔서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추사 김정희가 쓴 화암사의 현판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복층 펜트하우스 시경루詩境樓. 거실 한쪽 벽에는 5m가 넘는 커다란 책장을 짜 넣고 6m 길이의 테이블을 두어 다목적 라이브러리 공간으로 활용한다. 거실 테이블은 승효상 선생이 디자인하고 부산에 사는 박태홍 작가가 제작한 것. 아프리카 수종을 구해 원판으로 제작했다.


아래층 복도와 대면하는 작은 방들을 없애고 하나로 확장한 뒤 가운데에 다실을 배치했다. 집 속의 집(house in house)에서 작은 집에 해당하는 다실은 자연 철판으로 마감해 그 개념을 정의한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선방禪房이라 이름 지었다.

삼성동 펜트하우스를 취재하기 위해 민경식건축사사무소를 찾았다. “집을 바꾸면 운명이 바뀝니다.”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민경식 대표가 건넨 말은 다소 거창했고, 단호했다.
“시쳇말로 가끔 건축주에게 집과 운명을 논하며 이렇게 ‘사기’를 칩니다. 실제로 공간이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죠. 그래서 아파트를 고칠 때 ‘데커레이션’을 바꾼다는 생각만 하고 공간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방 배치만으로 가족이 행복해질 수도, 들어가기 싫은 집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죠.”

미래학자 페이스 팝콘은 현실이 점점 복잡해지고 혼란이 가중되면 사람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안락함을 느끼려는 욕구가 강해진다고 말했다. 영화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홈 시어터로 영화를 보거나 게임기로 운동을 즐기는 등 집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코쿠닝cocooning족까지는 아니더라도 현대인에게 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중요한 건 분명하다. “집주인은 이 집에서 10년을 살았어요. 초고층 아파트라 전망이 기가 막히죠. 처음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지만 살다 보니 심리적으로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더군요. 퇴근을 하고도 들어 가고 싶지 않고,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은 느낌이라고요.”

레노베이션을 하면서 집주인은 “머물고 싶은 집을 만들어달라”는 딱 한가지 주문만 했다. 이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한편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주거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파트는 성장 위주의 경제 논리 속에서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어왔다. 주거라는 게 존재의 시작이 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머물거나 사용하는 것보다 옮기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평수를 넓혀, 더 좋은 단지를 찾아, 더 밀도가 높은 곳으로! 집이 소유의 개념, 재산 증식의 방법이 되다 보니 내가 살던 집터는 아파트에 자리를 뺏기고, 기억에 남는 골목은 대부분 사라졌다. 아차 싶은 사람들은 다시 ‘집 짓기’에 열을 올린다.


한지 창살 너머로 시원한 전망이 바라보이는 다실 건너편 라운지 공간. 다도를 즐기며 바라보는 시원한 전망은 오전과 오후, 움직이는 시선에 따라 다채로운 풍경 사진을 관람하는 듯 색다른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손님 초대가 잦은 집주인의 지극히 기능적인 주방. 하부장, 상부장, 아일랜드 조리대 모두 자작나무 합판으로 마감해 실용적이다.


다실은 외벽의 작은 창문을 향하여 그 방향이 살짝 틀어져 앉혀졌다. 좋은 전망을 아껴 보라는 의미를 담아 아예 가벽을 세워 자그마한 창을 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재 한쪽에 히노키 욕조를 설치한 스파 라이브러리. 일하다 쉬고 싶을 때는 한강의 야경을 보며 반신욕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집’으로부터
“집을 짓는다는 것은 거기 그곳에 뿌리를 박고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욕심과 허상을 버리고 이곳에 나를 세우겠다는 뜻이지요. 집은 ‘장소성’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집주인은 처음에 아파트를 떠나 교외에 땅을 사서 집을 새로 짓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10년 이상 산 집인데, 그 기억을 없애버리지 말고 그냥 살라고 권해드렸어요. 가족의 영혼이 살찌고 정서가 뜨거워지고, 역사가 쌓이는 순간, 그 순간의 기록이 담겨 비로소 ‘집’이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집을 지은 것 이상의 효과는 자신했고요.” 민경식 대표는 집주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는 집주인은 직원들을 집으로 불러 업무를 볼 때도 많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종종 집으로 초대하는데 요리는 직접 해야 마음이 놓인단다. 최근에는 취미로 다도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글도 쓰고 음악, 미술에도 조예가 깊지만 아쉽게도 주거 공간에 대한 새로운 미학은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삼성동 주상 복합 아파트의 복층 펜트하우스. 처음 이 집에 들어서면 그 누구라도 5m가 넘는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시원한 전망에 매료된다. 하지만 민경식 대표는 거실 창 전체에 창살문을 설치해 전망을 오히려 차단했다. 아무리 좋은 전망도 매일 보면 지루해지기 마련. 집주인에게는 식상할 수 있는 전망을 선택해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좋은 것은 아껴보라는 의미를 담아 아예 가벽을 세워 자그마한 창만 뚫은 벽도 있다. 식구는 없는데 방이 많은 것 또한 집에서의 생활을 공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식구가 많은 집이라면 안방, 아이 방, 서재, 드레스룸 등으로 용도를 세분화해서 사용하면 되지만 이 집은 용도와 상관없이 결국 ‘빈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아파트의 칸막이 구조가 가족 간의 소통을 오히려 방해한다고 굳게 믿는 민경식 대표는 작은 방들의 벽체를 모두 없애고 ‘집 속의 집’을 테마로 한 다실을 배치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적인 공간인 아래층은 거실과 주방, 다실로 구성했고 침실과 드레스룸, 게스트룸은 모두 위층으로 옮겼다.

거실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책장을 짜 넣고 가운데에 6m 길이의 원목 테이블을 두어 공간감이 느껴지는 다이닝 겸 라이브러리를 완성했다.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빅 테이블은 요즘 집주인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커다란 한지 창살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과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그림자가 따스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니 10년 넘게 살던 익숙한 집에서도 느끼지 못한 안정감을 레노베이션한 후에야 비로소 느낀단다.

집주인이 개인 생활을 하는 2층 공간 역시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눈 뒤 침실과 욕실, 서재와 옷방·게스트룸 등 묶음으로 구성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복도를 지나 욕실과 침실, 테라스로 구성되는 식. 또 다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드레스룸을 지나 침실(게스트룸)과 서재가 차례로 나온다. 서재 한쪽에 히노키 욕조를 설치한 ‘스파 라이브러리’ 공간 또한 특징이다. 일하다 쉬고 싶을 때는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반신욕을 할 수도 있고, 욕조에서 나와 그대로 소파에 누워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1층은 다도와 독서, 음악 감상 등의 취미 생활을 하는 교류의 공간, 2층은 침실과 스파 라이브러리, 게스트룸 등 개인 생활 공간으로 구성했다. 계단은 난간을 없애고 곡면 구조를 활용해 초현실적 무드를 자아낸다.


1층 라운지와 라이브러리를 구분하는 벽면의 일부를 오픈 장으로 연출. 오디오 기기를 수납하는 동시에 공간과 공간이 소통하게 한다.

아파트, 건축적 리모델링이 필요한 이유
무엇보다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다실, 거실, 서재 등 공간 곳곳의 용도를 재구성한 점이다. 음악가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많이 접했다는 집주인이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공간에 맞는 평판 스피커를 제작해 오디오를 세팅하고, 곳곳에 분산되어 있던 책을 모두 끄집어내어 거실 책장을 채웠다.
‘집’ 속의 ‘집’을 테마로 한 다실은 개인의 취향을 즐기고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꾸민 독립적이면서도 개방된 공간이다. 필요에 따라 완전히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한옥의 들개문을 차용한 것. 숯색의 자연 철판으로 마감한 이 사각 박스는 외벽을 향해 각도가 살짝 틀어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다도를 즐기면서도 다채로운 풍경을 조망하라는 건축가의 영리한 의도가 담긴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주인이 다양한 분야에 취미가 있고, 굉장히 아방가르드한 사람이다 보니 차분하게 가라앉혀줄 필요가 있었어요. 장소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한옥을 떠올렸죠. 생각해보면 한옥은 그 자체가 자연이거든요. 자연끼리는 부대낌 없이 잘 어울리게 마련입니다. 자작나무로 제작한 책장과 부엌 가구, 한지 문, 구로 철판으로 마감한 다실 외벽, 한지 도배까지 자연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니 강하면서도 왠지 편안하게 느껴지죠. 다실쪽 바닥은 질감이 거친 사이잘sisal(사이잘 잎으로 엮어 만든 자연 카펫)로 마감했는데, 마치 마당을 밟는 느낌이 들어요.”

쪽마루를 살포시 밟고 다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옛집의 누마루에 앉은듯하다. 집의 이름 시경루詩境樓는 추사 고택의 누마루(市境樓)에서 차용한 것. 거실과 다실 맞은편 라운지 공간을 구분하는 벽은 중간에 가로로 긴 창을 내어 오디오를 세팅했는데 그 창을 통해 거실과 라운지가, 라운지와 다실이, 다실과 거실이 유기적으로 소통한다. 누마루와 들개문,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는 창살문까지 한옥의 요소들은 집 안에 있지만 또 집 밖에 있는 것 같은 초현실적 무드를 자아낸다. “아래층은 244㎡, 위층은 153㎡이니 사실 주택으로도 꽤 넓은 공간이에요. 레노베이션을 하기 전에 이 집을 봤을 때는 쓸데없이 크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예전보다 많이 비웠는데도 차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공간을 데커레이션하는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콘텐츠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꾸밀지는 사는 이가 살면서 하나씩 채우면 되니까요.”

설계와 시공 민경식건축사사무소 (02-749-0977,www.-in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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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현 수석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