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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김한준 제주행 슬로보트
반세기쯤 살다 보면 누구나 마음속 한구석에 작은 오두막집 하나쯤 품고 산다. 한적한 제주에 귤 창고처럼 아담하고 현무암처럼 무덤덤한 비밀 기지를 짓고 파도 소리를 벗 삼아 바다를 꿈꾸는 남자.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동네 어귀마다 슈퍼모델이 떼 지어 있는 형국”이라 비유하며 작은 프레임으로 숲과 나무, 노을을 수확하는 사진가 김한준을 만났다. 숲은 변하지 않아서 좋고, 바다는 항상 변해서 좋다는 그와 슬로보트에서 나눈 이야기는 느린 항해처럼 잔잔했다.

제주 애월읍 하귀리 작은 바닷가에 자리한 슬로보트. 사진가 김한준의 개인 작업실로, 집을 지으며 SNS에 건축일기를 올려 많은 이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슬로보트라는 이름처럼 공간에 천천히 자신만의 고유한 감도가 쌓이길 바라는 그는 언젠가 커피와 사진을 나누는 공간으로 대중에게 오픈할 계획을 이야기했다.
제주에 내려오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 어귀를 산책한다. 슬로보트는 밖에서 보면 1층 돌담에 2~3층 까만 건물이 살포시 얹혀 있는 형태. 70평 남짓한 대지에 연면적 143.47㎡(43.39평), 건축면적 102.75㎡(31평)로 1층부터 3층까지 오픈된 구조가 특징이다. 설계는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에이루트 건축사무소(www.arootarchitecture. com)에서 맡았다.

메자닌 구조의 2층 복도에서 내려다본 1층 갤러리. 계단 아래 서랍장을 두고 서랍을 열어 바다 사진을 펼친 아이디어가 재밌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처럼!

김한준 실장과 닮았다고 지인이 선물한 그림엽서와 공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아날로그 카메라.

그가 좋아하는 사진집과 사진을 전시할 수 있도록 오픈 선반장과 책장을 공간 곳곳에 짜 넣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대중과 사진, 글, 커피, 건축 이야기 등 소소한 단상을 나눌 생각이다.
<비밀 기지 만들기>라는 책이 있다. 책의 저자이자 건축가인 오가타 다카히로는 아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살아가는 한 ‘비밀 기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에는 비밀 기지 찾는 요령까지 소개한다. 벽장이나 소파 뒤, 문 뒤, 장롱 안, 툇마루 아래, 욕조 등 조금의 틈만 있다면, 그리고 고양이 수염 같은 감각으로 그 작은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면 어떤 장소든 비밀 기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달관적 태도에서 비롯한 이상에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터에서도 집 안에서도 심지어 온라인상에서도 온전히 숨지 못한다. “제 나이쯤 된 남자들은 많은 부분 공감할 거예요. 부모 세대가 있고, 돌봐야 할 자식과 가정이 있고,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나는 없고 웬 중년 남자가 서 있어요. 내가 행복해야 내 주변이 행복하잖아요.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잡지와 상업광고 사진을 찍으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진가 김한준은 얼마 전 제주 애월읍 하귀리 바닷가에 비밀 기지를 지었다. 물을 좋아하는 그가 제주 땅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제주가 뜨기 훨씬 전인 2005년부터였지만, 10년 후에야 비로소 실행에 옮겼다. 우리가 흔히 ‘패션’이라는 단어에서 기대하는 트렌드, 현란한 기교, 속도전에 점점 부침이 심했고 가짜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죄책감이라는 부채가 쌓여갈 즈음이었다. “제주의 장점은 합법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점이죠. 제주가 아무리 일일생활권이라 해도 밤 9시가 넘으면 물리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웃음) 자신의 동굴에 스스로 고립되고 싶은 남자들에게 최적의 조건이죠.”

땅으로부터 시작한 건축
김한준 실장은 2015년에 땅을 매입하고 그해 겨울에 설계 적임자를 찾았다. 여러 건축가를 알아보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 부부를 소개받았는데, 잰 체하지않는 점잖은 태도와 자신들의 부모님 집을 지으면서 프로젝트 이름을 담백하게 ‘제주어머니집’이라고 지은 점이 무척 마음에 들어 10분 만에 설계 계약을 했다(‘엄마네 집’ ‘어머니를 위한 집’이 아니어서 좋았다!). “계약은 빨리했지만, 착공은 지난해 7월 시작했으니 설계를 1년 반이나 한 셈이에요. 유독 디테일에 집착하는 까다로운 건축주 때문에 힘들었을 겁니다.” 설계를 맡은 에이루트 건축의 강정윤, 이창규 소장은 당시 제주에 내려와 몇 개의 작업을 하며 ‘제주스러움’에 대해 약간은 혼돈스럽던 시기였다고 고백한다. 첫 미팅 때 마치 판교 주택단지에 있을 것 같은 도시적인 3층 집 설계안을 들고 김한준 실장을 찾았는데, “좀 더 제주적일 수는 없을까요?”라는 한마디에 얼굴이 화끈거린 기억이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기존 제주 민가의 이미지를 담은 신축 건물, 즉 제주 귤 창고와도 같은 볼륨감을 생각하며 설계했고, 공간의 용도를 결정하며 또 한 차례 설계를 바꿔 지난해 7월 착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4월 준공 심의를 통과했다. ‘슬로보트’는 땅으로부터 시작한 건축이다. 마른오징어처럼 중간에 목이 좁아지는 못생긴 땅으로, 가장 좁은 부분을 기점으로 앞뒤가 긴 형태의 집을 구상했다. 김한준 실장이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 두 가지. 첫째,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을 살리되 아직도 구옥이 남아 있는 동네 풍경을 해치지 않는 형태이길 원했다. 둘째, 작업실로 사용할 계획이지만 언젠가 대중이 찾는 갤러리, 서점, 카페 등으로 용도가 바뀔 경우를 생각해 담백하면서도 강단이 있어 보이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슬로보트는 돌담 위에 얹힌 까만 감귤 창고 같은 형태가 됐다. 전면의 돌벽과 먹색 외벽은 건축가가 오래 고민한 것 중 하나다. 하귀리 바다는 물이 빠지면 거칠고 검은 현무암이 드러나는데, 썰물이 빠져나간 앞바다의 거뭇거뭇한 돌과 원래 있던 돌집 이미지를 생각하며 검은색으로 마감해 김한준 실장이 바라는 무덤덤하면서도 힘 있는 건물이 완성됐다. 제주가 고향인 이창규 소장은 북향이라는 한계와 바람과 습도 등 제주 특유의 환경을 고려해 마당을 건물 뒤쪽에 배치했다. “제주 북쪽 바다는 무척 거칠어요. 염분의 영향으로 나무가 자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옛 가옥들은 집을 낮게 짓고 주변으로 높은 담을 쌓아 바람을 막는 따뜻한 뒷마당을 구성했지요. 슬로보트 또한 안쪽으로 내밀하게 마당을 냈어요.”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폴딩 도어를 열면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트인 공간이 연출된다. 2~3층 높이의 건물이 뒷마당을 보호하는 가림막이 되니 햇살 좋은 날 마당에 앉아 귤나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쉴 수 있다.

김한준 실장은 주방에서 바라보는 거실 창밖의 바다 풍경을 가장 좋아한다. 창문은 그가 좋아하는 카메라의 파노라마 프레임을 토대로 가로세로 비율을 설계했다.

사진가 김한준은 중앙대학교 사진과, 브룩스 사진 대학원을 졸업하고 잡지, 광고 등 상업사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최근 제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바다, 숲, 돌 등 자신의 감성을 담은 풍경 사진과 스틸라이프를 선보일 예정이다. 뒤편에 대형 프린트로 걸린 사진도 그가 찍은 제주 바다 풍경이다.
창, 바다를 찍다
육중한 철제 문을 열고 1층으로 들어서면 합판으로 마감한 서가와 벽에 붙어 있는 대형 흑백사진 프린트를 마주한다. 외부에서 볼 때는 1층과 2ㆍ3층이 십자 형태로 교차되어 보이지만, 실내로 들어오면 하나의 볼륨을 지닌 공간으로 느껴진다. 1층 갤러리부터 작은 침실이 있는 3층까지 하나로 트인 구조로, 2층의 거실과 주방은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뉜 메자닌 구조로 구성했다. 무엇보다 작업실이 지닌 가장 본질적 매력은 평범한 주거 공간을 꾸밀 때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 “집이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공간이라면, 작업실은 그야말로 오롯이 나의 취향을 보여주는 공간이죠. 언젠가 천장이 높을수록 창의적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작업실에서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거예요. 화이트 노이즈라고 하죠? 저는 약간의 소음이 있어야 집중이 잘되는 편인데, 2층 거실이 딱 그래요. 제게는 맞춤복 같은 공간이죠.” 내부 공간은 모두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1층 서가와 테이블은 모두 나왕 합판으로 제작해 소박하면서도 미니멀한 느낌을 자아낸다. 2층 거실 난간은 외부와의 연결성을 고려해 제주 돌담을 낮게 쌓았다. 가구는 거친 노출 콘크리트 마감과 어울리는 북유럽 빈티지를 골랐고, 플로어 램프, 테이블 램프 등 부분 조명등으로 온기를 더했다. 주방에서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네 평 남짓한 침실은 슬로보트의 조타실이라 할 수 있다. 공간의 가장 큰 스토리텔링은 바로 창이다. 침실 창을 비롯해 제주 북쪽 바다를 바라보는 2층 거실 창이 메인 창으로, 김한준 실장이 가장 좋아하는 핫셀블러드 X-pan 카메라의 파노라마 프레임(24×65mm 포맷)으로 설계했다. 그래서일까? 한라산을 바라보는 긴 창도, 옆집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사각 창도 마치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북쪽 바다는 눈부심이 적어 오랫동안 조용히 감상하기 좋은데, 벽면을 차분한 녹색으로 마감해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담아낸 비디오아트처럼 느껴진다. 창호에 시선을 뺏기지 않도록 중간에 프레임이 없는 제품을 선택한 것이 특징.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던 김한준 실장은 명당은 따로 있다며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거실 소파는 마치 극장의 가장 앞자리에 앉은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렇게 주방에 서서 거실 창을 통해 먼 바다를 보는 뷰가 가장 좋아요. 저 앞의 큰 창이 카메라 렌즈고, 주방 앞에 있는 내 눈이 필름이 되는 거죠. 언젠가는 이곳에서 커피도 팔 건데, 손님이 커피를 받아서 돌아서는 순간, 저 창이 눈에 들어오면 그 풍경이 아주 인상적으로 각인되겠죠.” 1층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도 풍경을 즐길 수 있으니, 바로 천창 덕분이다. 9m 높이의 천장에 세로로 길게 파노라마 천창을 냈는데, 어떤 날은 구름 속도가 빠르게 느껴질 정도로 드라마틱한 하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콘크리트 바닥에 아른아른 비치는 문양도 2층 작은 마당 쪽으로 낸 천창 덕분. 기사에는 싣지 못했지만, 슬로보트 2층에는 1층이 내려다보이는 유리로 된 미니 저쿠지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작은 마당이 있다. 도로에서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 콘크리트로 담을 만들었고, 반신욕하면서 바다를 감상할 수 있도록 담에 가로로 긴 창을 뚫었다.


사진가라는 직업 특성상 빛에 민감하다는 그는 코너, 책상 등 공간 곳곳에 간접조명을 매치했다.

낮은 박공지붕, 노출 콘크리트와 대비되는 화이트 마감에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침실. 침대 맞은편 창은 스스로 풍경을 큐레이팅하며 연신 다른 그림을 보여주는 ‘스마트 액자’나 다름없다. 집 이름인 슬로보트도 침실 창밖을 바라보다 떠오른 것. 이름을 붙이고 나니 거대한 검은 집이 스스로 느린 항해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2층 주방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면 네 평 남짓한 자그마한 침실이 나온다.

바람이 거센 바닷가 마을에서는 집 뒤쪽에 마당을 배치한다. 1층 갤러리에서 폴딩 도어를 열면 필로티 구조 아래 작은 여유 공간이 나오는데, 휴식 공간으로 제격.

슬로보트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cameraobscura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으로 카메라의 어원이기도 하다.

김한준 실장이 찍은 제주 풍경 중 ‘비밀 숲’. 슬로보트 갤러리(@slowboat_atelier)에서 액자 형태로 판매할 예정이다.
김한준 실장은 제주 풍경을 ‘마치 슈퍼모델들이 시골 동네 코너를 돌자마자 우르르 앉아 있는 형국’이라 비유했다. 자신도 모르게 프레임을 통해 그 장면을 관음하고 결국 기록하는 곳, 제주. 그가 담을 풍경이 기대된다.

출항을 기다리며
집 짓기 초반에는 1층에 서점을 만들까 생각했다. 그런데 집을 지으면서 지내다 보니 제주는 습기가 너무 많아 책이 다 상하더란다. 그래서 서점은 포기하고 사진을 파는 갤러리(@slowboat_atelier)로 결정, 쉽게 전시하고 구매할 수 있는 액자 작업을 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커머셜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파인아티스트가 되는 것은 반칙이죠. 오랫동안 활동한 전업 작가만큼 잘할 수도 없고요. 음악으로 치자면 클래식보다는 대중가요랄까요? 1년에 세 번 정도 테마를 바꿔 작품을 전시할 계획입니다.” 작품의 테마는 자연. 바다, 숲, 노을, 돌…. 그간 손으로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하는 ‘반짝’이는 작업을 했다면,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도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소재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연’에 눈이 가더라는 것. 어쩌면 자연이야말로 그를 제주로 이끈 원동력이 아닐까. 그는 죽을 때까지 열 권의 책을 만드는 것도 목표 중 하나라고 했다(L 컴퍼니 퍼블리싱이라는 출판사를 운영, 2010년 <까칠한 김작가의 시시콜콜 사진이야기>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내일은 차귀도에 가서 숲을 수확할 거예요(사진 찍는 것을 수확에 비유한다). 사진도 마찬가지지만 글은 누가 있을 때는 더더욱 써지지 않는 작업이에요. 이렇게 고립되는 환경이 필요하죠. 소음없는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지낼 앞으로의 시간이 무척 기대가 돼요.” 개념 미술가이자 사진가인 소피 칼처럼 ‘사진 소설’을 쓰고 싶다는 김한준 실장. 작업실-서점-갤러리로 공간의 계획이 바뀌었듯 이곳이 익숙해지면 언제 또 훌쩍 다른 비밀 기지를 찾을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비밀 기지가 있다. 작지만 묵직하고, 자유롭지만 밀도 있는 이 공간에서 ‘걸작의 탄생’을 예견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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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