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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가 박실 씨의 가회동 한옥 찬찬히 들여다 볼수록 감동하는 집
마당으로 꽃과 나무, 창밖으로 하늘을 담는 집, 한옥은 박실 씨가 좋아하는 지피식물의 꽃과 닮았다. 땅에 붙어사는 지피식물의 작디작은 꽃은 가만히 들여다보아야만 제 매력을 보여준다. 크고 화려한 서양 꽃처럼 단번에 시선을 끌지는 않지만 웅크리고 앉아 들여다볼수록 알게 되는 경이로움이 있다. 한옥도 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찬찬히 살면서 볼수록 감동하게 되는 집이다.

공들인 마감으로 섬세하고 깔끔한 멋이 우러난다.

나무 문살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그가 한옥에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다. 바깥쪽 문은 종이 창호 대신 유리 창호를 선택해 추위를 대비했다.

박실 씨는 이 한옥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걸 계획. 현재까지 강력한 후보에 오른 이름은 한옥의 담백한 멋을 표현한 ‘담담재’와 그 자신의 이름을 발음대로 담은 ‘시리재’.
설치미술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실 씨. 그가 가회동에 작은 한옥을 꾸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설치미술가의 한옥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완성된 모습을 보기까지는 실로 한참이 걸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고, 점찍어두었던 주방가구가 제 때 들어오지 못하고, 아직도, 그리고 또 아직도 계속 미완성이었다. “아직 방석이랑 이불을 못 했는데, 어쩌지요?” 궁금증이 1년의 시간을 채워갈 때쯤 2%의 미완성은 우선 눈감아두기로 하고 그의 작은 한옥을 찾아갔다. 조금만 방심해도 길을 잃게 되는 가회동 골목, 번지수로 간신히 그의 한옥을 찾아 삐거덕거리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긴 기다림에 보람을 느낄 만큼, 박실 씨 한옥의 첫인상은 참으로 고왔다. “우리처럼 작품 하는 사람들은 디테일에 대한 고집이 만만치 않잖아요. 결국 기둥부터 서까래, 대들보 위치, 주방 붙박이장과 아일랜드 주방 높이, 문살 종류까지 모두 직접 재고 그림 그리면서 정했어요.” 30평 대지에 들어선 ㄴ자형 작은 한옥은 어느 구석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곳이 없다. 한옥 건축가에게 일임하여 맡긴 여느 도시형 한옥과는 달리 어느 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깔끔하고 담백하게 마무리된 가운데 은근한 개성과 표정이 드러난다.

에어컨과 TV를 감쪽같이 숨긴 담백한 한옥
그가 이 한옥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년 전. 당시 이 집은 개화기 양식이 뒤섞여 있는 시대 불명의 한옥에, 집주인이 세를 주기 위해 덧대어 지은 방이 불쑥 들어선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박실 씨는 이를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하여 고쳤는데, 마치 조각 작품을 만들 때처럼 구석구석 애정을 담아 완성해갔다. 대청마루 바닥에는 5cm 두께의 홍송을 우물마루 방식으로 깔고, 바깥으로 향한 창문은 문살 모양을 살린 이중 유리창을 달았다. 겨울 추위를 대비해 안쪽 창에는 페어 글라스를 사용했다. 천장은 내부에서 서까래가 시원스럽게 보이도록 텄고, 주방에는 편리하면서도 한옥의 정갈함을 해치지 않는 현대적인 주방가구를 매치했다. 건넌방에는 TV나 노트북 같은 첨단 기기를 장 속에 숨겨 설치했고, 여름 한철 잠깐 쓰고 마는 에어컨도 수납장 맨 위 칸에 감쪽같이 감추었다.

“이 한옥은 세컨드 하우스로 쓸 예정인데 누가 머물다 가든 불편함이 없도록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었어요. 와인 냉장고까지 갖춘 주방에, 욕실에서 샤워도 할 수 있고, 어느 방이든 랜 선만 꽂으면 인터넷도 마음대로 쓸 수 있지요. 이런 장치들이 한옥의 멋을 해치지 않도록 숨기고 조화시키느라 아이디어를 많이 짰지요. 또 한옥이 밀집된 가회동이기에 발생하는 한계를 제 나름대로 보완해보았어요. 대청마루 뒤쪽의 창을 열면 바로 옆집의 담인데, 그 공간을 삭막한 벽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화초나 오브제를 전시하여 창을 열어도 흉하지 않도록 했답니다. 그리고 아스팔트로 뒤덮인 대문 바깥 길목에는 우리 집 담을 60cm 안으로 후퇴시키고 대신 그 자리에 꽃나무들을 심었어요.” 남천, 오죽, 불두화, 산수국이 사이좋게 서 있는 이 집의 담벼락은 가회동의 천편일률적인 무뚝뚝한 담벼락과 달리 아기자기한 정겨움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말을 건다. 예술가 아니랄까 봐 집 구석구석 예민한 더듬이로 감지한 귀한 배려가 숨어 있다. 조명 스위치 하나 그냥 달지 않은 것이다.

ㄴ자형 한옥에서 안방에 해당하는 부분. 한지 등, 옛날 책상인 서안, 원형 나무 오브제 등 집주인의 감각으로 매치한 소품이 담백한 공간에 운치를 더해준다. 창으로 들어와 부서지는 햇빛이 무척이나 곱다.

한옥은 현대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집이라고 생각하는 박실 씨.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마주치는 한옥의 비례미와 조형감은 그 어떤 최신 건축물 부럽지 않게 아름답고 멋스럽다.

담을 후퇴시키고 나무를 심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인 것 중에서 마당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서울답지 않은 고요함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또옥, 또옥, 또옥’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청명한 소리가 들린다. 어디 근처에 개울이 있는 것은 아니고, 바로 마당의 낡은 펌프에서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는 소리다. 옛날 1960~70년대에나 사용하던 낡은 펌프를 구해 마당에 세워놓고 거기서 조금씩 물이 떨어지도록 해, 청각적인 멋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그 물이 어디로 떨어지는가 하면 다양한 수생식물이 옹기종기 사이좋게 자라고 있는 물확 위다. 이 운치 있는 물확은 마치 바위가 그렇듯 보이지 않는 지면 아래로 1톤에 이르는 커다란 몸체를 숨기고 있다. 그의 양평 작업실에서 가져온 것으로, 크레인을 타고 기와지붕을 공중으로 넘어오는 난관 끝에 간신히 마당에 안착했다. 물확 뒤로 담을 따라서는 매화, 감나무, 머루, 백일홍 등이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다. 앞집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나무와 지피식물이 멋진 조화를 이루니, 잘 모르는 시조라도 한 수 읊어야 할 듯하다. 아무리 감성적인 일을 하는 예술가라지만 이 정도의 손길이면 한옥이 처음일 리 없다. “1985년쯤인가, 양평 무두리에 한옥을 마련하고 푹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곳과는 달리 주변으로 펼쳐진 자연 속에 여유롭게 들어앉은 한옥이었어요. 그 한옥에 거의 주말마다 갔지요. 뜨끈뜨끈한 군불이 좋아 이불이 눌어붙도록 몸을 지지다 오기도 하고, 봄에는 쑥도 뜯으러 가고 오디나무에서 오디를 따다 오디 잼을 만들어서 실컷 먹었어요. 커피를 마시고 다도를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작업에 열중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편안한 한옥을 참으로 잘 즐겼어요. 그렇게 자연 안에 자유롭게 펼쳐져 있는 한옥도 좋았지만, 이 집처럼 작은 숨결 하나하나가 가까이 느껴지는 한옥도 매력적이에요.”

한옥이지만 머물다 가는 사람이 불편함이 없도록 TV와 노트북 등을 갖춰놓았다. 나무와 한지로 마감한 장을 만들어 그 안에 TV를 설치,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문만 닫으면 깔끔하게 정리되도록 했다. 장 위로 서까래 천장까지 공간을 터서 답답하지 않도록 했고, 그 사이 공간에 조명을 설치해 밤이 되면 나무 서까래 아래로 은은한 불빛이 비치도록 했다.

색색의 고운 비단 이불은 한옥에서 쓸 요량으로 특별히 맞춘 것들이다. 이불장 위의 작은 수납 칸에는 에어컨이 숨어 있다. 여름 한철 쓰고 마는 에어컨이지만 한옥에 설치할 곳이 마땅치 않아 대들보 위로 보기 싫게 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 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 적절히 숨긴 지혜가 돋보인다. 여름에는 수납장 문을 열어 쓰고 겨울 동안 닫아두면 감쪽같다.

현대적인 주방 개수대와 한식 창호가 낯선 듯 잘 어울린다. 주방 상판의 돌은 그가 특별히 엄선한 것으로, 돌 표면이 거친 한지의 질감과 닮았다. 선반 왼쪽에 놓인 병 모양 오브제는 그가 파리에 머물 때 만든 작품이다.

작고 예쁜 화장실은 이 집의 매력 포인트. 정겨운 멋의 펜턴트 조명, 돌 소재의 세면대, 모던한 수전, 굵은 대나무 두 쪽으로 연출한 휴지 걸이, 티크목 바닥 등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고른 것이 없다.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대명사로 곧잘 언급되는 변기 옆 필라스터 책장도 눈길을 끈다.

정갈하고 담박한 멋이 돋보이는 이 한옥에서 컬러풀한 모던 의자는 경쾌하고 참신한 악센트가 된다.

기와 위로 눈 내릴 겨울을 기다린다
그는 미술 작업을 하는 사람이지만 건축에 대한 동경이 있다. 파리에 머물던 몇 년 동안,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미술 작품보다 그것을 담고 있는 건축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건축물 중에서도 특히 한옥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기보다는 서서히 마음이 물들어 사랑하게 되는 대상이다. 보와 기둥, 창호, 기와와 담 등 시선을 돌리는 구석구석마다 아름다운 비례감과 구도를 자랑하는 뛰어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아니, 아름답다는 차원 이상으로 한국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감동하게 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있다. “한옥은 자연과 소통하게 하는 집이에요. 갈라지는 나무 기둥의 틈까지도 멋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한옥에 살 자격이 있지요.” 박실 씨는 유난히 생명 있는 것을 잘 보살핀다. 비실대던 식물도 그의 손에만 들어오면 푸르게 되살아난다. 그가 키우던 강아지는 열일곱 살까지 장수하기도 했다. 이 한옥 역시 그의 손에서 오래오래 윤기 나고 생기 도는 집이 될 것 같다. 요사이는 서둘러 한옥의 겨울을 구상 중이다. 짚으로 만든 나무의 옷, 잠복소와 기와지붕 위로 소복이 눈이 쌓일 겨울 풍경을 기대하고 또 준비하고 있다.


 한옥 어디를 보아도 아름다운 비례미를 찾을 수 있다.

담을 안쪽으로 후퇴시키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었다. 자신의 공간을 양보하여 행인을 위한 풍경을 만든 셈.

마당에 낡은 펌프를 세워놓고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도록 연출했다. 들리는 소리까지 배려한 그의 손길이 부지런하다.

물이 빠지는 수챗 구멍을 가리기 위해 조약돌을 여럿 얹었다.

문고리 잠금쇠마저도 어여쁘다.

조명이 한옥의 멋을 해치지 않도록 매입형으로 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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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영선 기자 사진 김동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