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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의 원서동 한옥 내 어머니 부엌처럼 따뜻한 집
젊은 세대와 전통의 만남, 첨단 기법을 동원해 전시회를 색다르게 연출할 만큼 열린 사고를 가진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 요란하거나 과하지 않게, 마치 그의 인품처럼 오래 지나도 은은한 향이 나는 원서동 한옥을 찾았다. 느슨한 마음으로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사근사근하고 속 편한 집.


스무 평짜리 검박한 한옥이지만 대청마루의 폴딩 도어를 열면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너른 무대가 된다. 집이지만 작은 전시회나 음악회 등 이벤트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디자인은 인엑스 디자인 현원명 소장이 맡았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창경궁 북쪽 담장길. 비교적 한산한 그 길을 올라가면 ‘궁중음식연구원’이라고 적힌 청홍빛 스테인드글라스 설치물이 반짝인다. 조선 궁중 음식의 명맥을 잇는 곳답게 아담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한옥. 이곳은 음식을 통해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는 궁중 음식 연구가이자 무형문화재 제38호인 한복 려 원장의 주거 공간이기도 하다.

하는 일 앞에 ‘궁중’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까닭일까. 우연이자 필연으로 궁궐 옆에 터를 잡은 지 16년. 선생은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은 돌볼 틈 없이 오직 일에만 매진해왔다.

“비록 낡았지만 아담한 한옥과 이층집이 한 울타리에 있으니 연구원의 조건에 딱 들어맞았죠. 생의 마지막은 꼭 한옥에서 지내고 싶다는 어머니 바람도 있었고, 전수자를 위한 실습실도 필요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구 자료와 서적, 그릇, 식재료 등에 치이는 거예요. 옆집까지 확장해 연구원의 규모는 넓어졌지만 정작 나를 위한 공간은 단 한 평의 여유도 없었어요. 사는 데 불편한 것도 문제지만 손님이 와도 편하게 앉아 담소를 나눌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근본 해결책이 필요했죠.” 사람 사이의 정을 나누게 하는 것이 음식이라면 ‘집’은 그 음식의 연을 맺기 위한 장소이자 추억의 접점이다. 건강 밥상만큼 중요한 것이 건강한 집. 그는 고민 끝에 한옥을 레노베이션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1 누구나 와서 차 한잔 마시는 다실. 장지방의 한지와 손수 제작한 젓가락 아트월에서 고졸한 멋이 느껴진다.
2 다실에서 바라본 응접실 겸 서재. 한복려 원장의 업무 공간으로 복도를 따라 길게 배치한 책상과 오방색 비단 표구로 개성을 더한 책장이 포인트다.

자상한 마음이 엿보이는 집 레노베이션은 공간 디자이너 현원명 씨가 맡았다. 궁궐 옆에서 궁중 음식을 연구하는 것이 우연이자 필연이었듯 한복려 씨와 디자이너가 인연을 맺은 스토리 또한 그러하다. 동네 산책길에 발견한 레스토랑 ‘북스쿡스’의 입구. ‘스푼’과 ‘나이프’를 일렬로 걸어놓은 모습을 본 한복려 씨는 주인장에게 디자이너를 소개해달라 청했다. 연구원 간판에 식문화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자 한 터라 디자이너의 조언이 필요했고, 현원명 씨는 청홍빛 스테인드글라스와 스틸 프레임으로 전통을 재해석한 궁중음식연구원의 상징물을 완성했다.

“마침 함양에서 박이 세 덩어리가 와서 박죽 먹을 사람 모이라고 트위터에 올렸어요. 그때 현 소장이 스마트폰이 없었는데, 박죽 먹고 싶으면 트위터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다음 날 바로 스마트폰을 들고 왔어요. 현 소장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이 뒤죽박죽 모여 박죽을 먹는다고 해서 ‘뒤박당’이라고 이름짓고, 그때부터 식문화와 관련한 정기 모임을 갖고 있어요.”

지난해 봄에는 뒤박당 멤버들과 힘을 합쳐 정해년 신정왕후 팔순 잔치를 재현하는 전시도 펼쳤다. 음식과 음악, 미디어 아트가 결합된 전시에서 현원명 씨는 공간 디렉팅을 맡았다. 그렇게 ‘숟가락’ 하나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 작은 한옥에 주거, 손님 응대, 세미나를 위한 공간은 물론 연구 공간까지 담을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함께 고민했다. 불필요한 허식을 덜어내 집의 근원적인 매력과 형태를 느낄 수 있도록 개조한 스무 평 남짓한 검박한 한옥이 그 결과물이다.


노란 이불을 덮어놓은 조촐하면서도 아담한 침실. 창을 밖으로 뺀 덕분에 그 자체로 선반 수납장이 되었다. 바닥과 난방 모두 보강하고 문틀까지 모두 생활에 편리하도록 바꿨다.


이 집은 마치 잘 고안한 삼단 합 같다. 그 안에 있는 가구나 살림살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장식품, 책장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한옥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며 생활의 즐거움과 풍족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새가 전깃줄에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의 찻주전자 컬렉션은 창문 아래 선반을 달아 올려두었다

이 집은 ㄱ자형 한옥이다. 동쪽을 향한 ㄱ자형의 가로 부분은 다실, 주방, 응접실 겸 서재가 자리하고, 남쪽을 향한 세로 부분은 대청과 침실, 욕실로 구성했다. 하지만 구조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치밀하게 계산한 겹집 구조랄까? 응접실 옆으로는 세 계단 아래 레일형 서가가 있고, 대청을 가른 가벽 뒤로 드레스룸이 자리한다. 나아가 쓸모없는 공간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곳곳에 치밀하게 선반을 배치한 아이디어와 좁은 공간을 활용한 아트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집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으니 “편안하신가요?”라고, 디자이너 현원명 씨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자못 복잡할 수 있는 구조지만 툇마루에 올라 다실부터 침실까지 나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처음 들어와본 곳임에도 “또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안도감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용솟음쳤다고 할까.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응접실 겸 서재의 기다란 책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다실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집에 담겨 있는 수많은 ‘히스토리’ 때문이다.

다실은 故 황혜성 선생이 쓰던 방으로 창문 너머로 연구원 회원이 오가는 걸 바라보던 곳이다. 누구나 와서 편안히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이 공간의 백미는 바로 젓가락 아트월. 1백8개의 젓가락은 벽에 와이어를 부착해 하나하나 끼워 완성한 것으로 백팔번뇌를 상징한다. “젓가락은 어머니와 함께 30~40년간 여행을 다니며 모은 것이에요. 공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젓가락 뭉치를 들고 현소장을 쫓아다녔어요. 내가 들고 있는 건 젓가락이라는 사물이지만, 디자이너는 이러한 컬렉션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알 수 있을거라 믿었죠.” 그다음부터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 진행되었다. 현원명 씨는 대청마루 한쪽 벽은 어머니 사진을 담은 액자를 달아 히스토리 월로 꾸미고 맞은편 벽은 옛 숟가락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집의 중심이 되는 대청마루의 벽면 수납장 위에는 각양각색의 함, ‘밥통’ 컬렉션을 두었다. 우리 음식의 근간은 밥에서 시작하니 밥통과 숟가락 그리고 한옥, 참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왼쪽) 옛 숟가락을 조르르 걸어 완성한 아트월. 
(오른쪽) 대청마루를 나눠 한쪽은 드레스룸으로, 한쪽은 다이닝 룸 겸 갤러리로 활용한다. 짐이 줄어드니 자연히 집이 넓어졌다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집 디자이너는 이 집만을 위한 특별한 가구를 디자인했다. 나무 박스를 비단으로 감싸 선반 받침으로 활용한 책장이 그것. 혜경궁 홍씨 회갑 잔치를 기록한 고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책장 선반과 테이블 단면, 대청 수납장에 활용했다. 또 한옥에서 가장 고민스러운 ‘수납’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해결했다. 우선 서고로 활용하던 지하 공간은 이중으로 책장을 짜 넣고 가운데는 기찻길처럼 레일을 달아 이동할 수 있는 책장을 설치했다. 그릇은 대청마루의 12폭 벽면 수납장을 가득 채웠다. 유심히 보았다면 눈치챘을 테지만 이 집은 대청마루가 좁은 편이다. 2:1 비율로 나눠 가벽을 세운 뒤 뒤쪽을 드레스룸으로 활용하는 재치를 발휘한 것. 주방 싱크대 옆 10cm 남짓한 공간에 가위를 조르르 걸어두고, 툇마루 아래에는 문을 달아 신발장으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도 재미있다.

“흔히 친한 사이일수록 일로는 만나지 말라고 하잖아요. ‘뒤박당’ 모임에서도 많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과연 지근한 거리에서 한복 려 원장의 삶의 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고민할 필요가 없더군요. ‘내가 풀어보자!’고 작정하고 공사 기간 내내 연구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먹었어요.” 현원명 씨는 “좋은 디자인은 좋은 의뢰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을 철칙으로 삼는다.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믿어주고 의뢰인이 함께 고민할 때 걸작이 탄생하는 법. 열어들개문과 폴딩 도어, 향나무 대청마루와 원목 마루…. 전통의 맥을 잇는 곳인 만큼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틀을 깨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역시 현명하게 풀어나갔다.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지’를 생각하면 의외로 간단 명료하다는 것. 결국 집이란 생활의 실마리가 되는 부분이 모이고 쌓여 완성되는 것 아닌가!

아침에 눈뜨면 빨리 오고 싶은 곳. ‘굿모닝’과 ‘굿나잇’ 인사를 하며 40여 일 집을 고치는 동안 힘들기보다 설레었다는 디자이너와 밥해서 먹이는 즐거움이 컸다는 한복려 원장.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문득 르 코르뷔지에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작은 집’이 떠오른다. 코르뷔지에의 모친이 백한 살까지 장수하고 돌아가시기까지 36년에 걸쳐 살던 집. 그리고 현원명 씨의 유쾌한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돈다. “최소한 40년 사실 집이니까. 그렇죠, 선생님. 편안하시지요?”

건축적이면서 생활적인 디테일의 힘!
공을 들여 설계하고 정성을 들여 지은 집은 주의 깊게 씹고 여유롭게 음미하며 소소한 부분까지 천천히 살펴보아야 한다. 실용적이면서 감각적인 1%의 디테일!

1 붙박이 수납장을 비단으로 멋스럽게 커버링하니 갤러리 같은 공간이 완성되었다.
2 주방 옆 틈새 공간에 각종 가위 수납.
3 응접실 테이블 위 조명등 박스 역시 수납공간. 아기자기한 소품을 자석으로 조르르 붙여둘 수도록 철제 구조물로 만들었다. 옛 나무 접시에 채색을 더한 남천 송수남 작가의 오브 제로 포인트를 주었다. 
4, 6 합판과 합판 사이, 선반 받침을 비단으로 감싼 아이디어. 원단의 종류와 빛깔, 문양은 한복려 씨가 디자이너와 함께 다니며 직접 골랐다. 
5 자칫 인상이 강해 보일 수 있는 서까래를 상대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천장 양쪽을 가려주는 합판을 설치했다. 거북이는 송수남 선생의 작품. 원래 문빗장 장식인데 거꾸로 천장에 매달았다.


7 보일러실이던 작은 공간에 히노키 반신 욕조를 설치. 허투루 쓴 공간이 없다. 
8 궁중음식연구원의 역사를 담은 히스토리 월.

디자인 및 시공 인엑스 디자인(www.inexdesi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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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