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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좋아한다고 말은 했을까

그날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두근거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는 그 풍경에 몸을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어쩌면 수십 분을 된통 끌려다니다 마침내 사지가 너덜너덜해졌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초가을의 문턱, 어느 나무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다.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호젓한 길을 걷는다. 어깨엔 가방을 메고, 한 손엔 노트 같은 것이 들려 있다. 그런데 커다란 나무 뒤로 뭔가가 언뜻 보인다.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 물체는 조금씩 조금씩 소녀가 안 보이는 쪽으로 각도를 틀어 이동을 한다. 기다렸다 가만히 보니 물체의 정체는 한 소년이다.

소년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숨기려 애쓰면서도 쿵쾅쿵쾅 뛰어대는 심장을 감추지 못한다. 소년이 소녀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기다리다가 소녀가 자기 앞을 지나가면 곧이어 소녀 뒤를 따를 거라는 귀여운 시나리오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둘은 어떤 사이일까. 소년이 소녀를 좋아한 지 3일째 되는 날인가. 소녀가 헤어지자고 말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일지도. 아니 어쩌면 모든 상상을 불허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였다. 마치 섬광 같은 반전이 있었다. 소녀가 나무를 충분히 지나친 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에 가려진 소년을 살짝 어깨 한쪽으로 넘기면서 지나치는 그 상태였다.

소녀가 큭큭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최대한 어깨의 들썩임을 자제한 채. 주변에 꽃들이 피어 있었다면 같이 웃었을 텐데 나만 웃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목격한 듯 싱글벙글하면서 별로 좋을 것도 안 좋을 것도 없던 기분이 급작스레 수만 개의 풍선을 달고 떠올랐다. 좋아한다고 말은 했을까. 아니, 아직 말하지 못했을 거야. 소녀가 그냥 소년의 행동만 기다리고 있을 뿐. 소녀도 소년이 싫지 않은 기색이야.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묘한 타이밍에 저리 아름답게 웃을 수는 없어. 하늘은 높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높아지는 것은 여름이 그치고 어쩌지 못한 감정들이 침착하게 한곳에 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한곳이라는 데는 바로 사람의 마음이고. 같은 상황이라 해도 봄에 보는 것과 가을에 보는 것은 다르다.

봄에 봄으로써 “아련하다”고 반응하는 것을, 가을에 봄으로써 “보고 싶다”라고 중얼거리게도 한다. 봄에 피어난 꽃들에게서 뭔가를 수혈받는다면 가을에 떨어지는 것들 앞에서는 마음이 호릿해져서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봄에 가슴이 뭉글뭉글해지는 것이 가을에는 뭉클뭉클해지지 않던가 말이다. 나는 가을 초입의 나무 한 그루가 연출한 것인지도 모를 이 소녀와 소년의 감정을 오래 기억하고만 싶다. 이 사랑의 그림 한 장을 가슴팍에 품은 이상 나는 당분간 등짐을 무거이 지고도 뛸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도 나를 기억했으면 한다. 나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래 훔쳐보고는 하나하나 세세히 간직하려는 한 사내의 안간힘이 이 가을을 서서히 짙게 물들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사람들이 없으면 계절은 조화를 부리지도 않는다. 계절의 틈새에서 사람은 생겨나고 자라고 익는다. 우리나라처럼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양손으로 계절의 감각을 떠먹으며 풍부한 표정을 얼굴에 올린다. 한 계절을 잘 보내고 다음 계절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은 그토록 계절에 자신을 투영해 살아 있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려 한다. 그 모습은, 그 마음은 얼마나 절절한가 말이다. 입장 절차 없이도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계절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나무아래 가만히 있어봐야겠다. 어쩌면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나뭇잎만은 아닐 수도 있을 테니.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에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봄의 감성과 가을의 감성이 다르니 계절마다 마음을 울리는 장면도 변화합니다. 우리의 삶도 사계절처럼 다채로워지지요. 글을 쓴 이병률 시인은 시와 여행 에세이를 쓰는 작가입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좋은 사람들’로 등단했으며, 그가 쓴 여행 에세이 <끌림>은 10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로 많은 이에게 끌림과 여운을 전했습니다. <끌림>에 이어 낸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도 큰 사랑을 받았으며, 시집으로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