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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숲에 들어갔다가 잠시 놀랐습니다.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초록을 보러 들어갔다가 보러 간 그 눈은 감고 오랜만에 풍겨오는 풀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디선가 기계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잡초를 베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향하는 숲 속으로 점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초록의 냄새가 짙어졌습니다. 인적이라곤 하나 없는 그 숲을 이토록 짙푸르게 장악하는 냄새. 그래도 어딘가 깊숙이까지 가봐야겠다 싶어 들어선 숲길이기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우거진 풀을 면도하고 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뒷걸음치면서 무릎까지 자란 풀을 정성스럽게 깎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숲길은 아주 좁아서 내가 지나가려면 사내와 몸을 엇갈려야만 할 것 같아 나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저 좀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하지만 내 소리까지 면도합니다. 사내의 면도날 소리가 너무 컸던 거지요. ‘아, 어쩌지’ 하다가 나는 사내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인기척을 냅니다.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몰두하고 있는 그의 집중을 내가 방해한 것입니다.

“깜짝 놀랐네요.”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사내가 많이 놀라서. 나는 계속해서 숲길을 걸었습니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도와 숲의 습도가 비슷해서 좋았습니다. 그가 풀을 깎으면서 걸어온 길은 꽤 길었습니다. 막 베인 풀에서 나는 향기. 그 향기 앞에 철퍼덕 주저앉아 아주 오래전부터 이 냄새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데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내가 영영 이 냄새를 잊고 말았다면, 그렇게 살 있었다면 나는 형편없이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저녁에 무슨 생각인가로부터 간절해져서 내가 원하는 것과 갖고 싶은 것과 내가 바라는 것과 내가 잊은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멋진 단편소설 하나를 읽고 그 감동에 젖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 가보지 않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나라 하나를 정해 무작정 그리워하거나 그곳 날씨를 매일매일 들여다볼 것. 텃밭에 상추를 기르는 친구가 벌레를 잡았다고 보낸 문자를 들여다보며 한참 부러워할 것. 먼 곳에 사는 친구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내가 며칠 안에 내려갈 테니 좀 기다리라고 말해놓을 것. 물속에서 수영을 하다가 돌고래 떼를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지 준비해놓을 것. 상하이에서 기차를 타고 네 시간 반을 가면 닿을 수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검색해볼 것. 녹슨 선풍기를 닦으려면 어떤 약품이 필요한지 잘 알 만한 친구 하나 사귀어놓을 것. 어디까지 적은 걸까요. 나는 그때까지 적은 것을 며칠이 지나서야 열어보려고 합니다. 지금 펼쳐보면 깊은 밤 쓴 편지를 다음 날 아침에 펼쳐보는 격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무엇으로 얼굴이 붉어졌습니까? 그런데도 그 좋아하던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지요. 우리가 이토록 둔탁하고 뻔뻔해지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대체되는 것이 많아서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든 그러지 않은 것이든 새로운 물질과 공간과 사람의 대체를 겪으면서 뒤를 돌아볼 시간마저 상실했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지요. 이토록 우리를 방해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는지요. 우리의 꿈을, 우리의 방향을 방해하는 것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무뎌지게 될는지요.

나는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지고 있는 걸까를 묻는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삶의 속도와 의무에 쫓겨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잊어버리면 우리 삶은 수동태로 변화합니다. 반면 우리 삶이 능동태로 전환될 때 인생은 우리에게 의미와 재미라는 값진 선물을 선사하지요. 글을 쓴 이병률 시인은 시와 여행 에세이를 쓰는 작가입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좋은 사람들’로 등단했으며, 그가 쓴 여행 에세이 <끌림>은 10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로 많은 이에게 끌림과 여운을 전했습니다. <끌림>에 이어 낸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도 큰 사랑을 받았으며, 시집으로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