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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격랑을 넘어서

1년 전 나는 섬에 있었다. 섬 여행이 특별하고도 각별한 취미가 된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섬에 들고 나고 한 지도 꽤 오래된 일이 되었다. 그때 섬에 간 것은 힘겨운 일 때문이었다. 그 일 을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조금만 밝히자면 당시 많이 믿는 한 사람이 있었고 그 믿는 사람에게 거짓말과 오물을 된통 뒤집어쓴 일이 있었다. 용서하자니 내가 뭐라고 감히 한 사람을 용서할까도 싶었고, 그냥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자니 또 내가 감히 누구라고 누구를 그리 생각하나 싶어 마음에 욕창이 생긴 그 봄이었다.

섬에서의 며칠은, 악몽을 꾸는 날과 걷다가도 가슴이 미어져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구나 싶은 날의 연속이었다.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자전거를 타고 지칠 때까지 달려보자는 마음에서였다. 도저히 내 실력으로는 오를 수 없는 가파른 길을 오르고 그 길을 지나 내리막길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 아주 상큼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더 강하게 느끼려고 내리막길에서 조금 속도를 냈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숲길을 달리고 있을 때 얼굴과 팔뚝에 한꺼번에 달라붙는 것이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송충이들이 놀이를 하고 있던 건지 자신의 몸에서 실을 공중에 늘어뜨려 나무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곳을 관통하는 바람에 송충이 여러 마리를 온몸에 덕지덕지 매달고 달려야 했다. 많이 놀랐기에 그만 본능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나는 공중으로 붕 떠서 날아올랐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넣어둔 카메라는 공중으로 더 높이 치솟았다. 무릎이 심하게 까지고 팔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팔을 거친 땅바닥에 갈아버린 것이다. 그때 나는 왜 그 생각이 떠올랐을까. 왜 그 상황에서 굳이 그 질문을 내게 던져야 했을까. 나는 그렇게 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과연 그 사람이 너한테 한 행동이 더 아픈가, 지금 너덜너덜해진 네 팔이 더 아픈가?’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저지른 그 행동이 더 아프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저 멀리 나뒹굴어 박살이 난 카메라를 간신히 줍고, 그늘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거친 뙤약볕 아래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어제부터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에 허기가 몰려왔다. 마을로 내려갔지만 식당이 없었다. 구급약도 얻고 뭔가 먹기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그 집은 약도 있었고 먹을 것도 있었다. 고마운 집주인은 잠시 쉬었다 가겠느냐면서 어느 방의 방문을 열어주었는데, 그 방에는 바다로 난 창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잘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팔에 엄청난 흉터가 남아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어떤 훈장도 아니지만 어느 한 시절을 내 좋은 마음으로만 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가치’ 쯤으로 여기는 중이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살고자 하는 길의 방향이 더 선명해지고 진해지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해지니 나는 그저 그것이 고맙다. 그래서 더 큰 파도를 기다린다. 더 큰 파도가 온다면 기꺼이 온몸으로 맞이하겠다.

아직도 여전히 그렇게 못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애도한다. 그 마음으로 살아도 그럭저럭 살아진다고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아름다운 것으로만 빚어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보내졌건만 애써 그것을 모른 척하고 살려는 사람들을 애도한다. 지난봄과 이번 봄에는 마치 큰 습격을 받아 파헤쳐진 것처럼 덮어도 덮히지 않는 마음이 있었음을이 찬란한 봄을 향해 사과한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 충격의 파동으로 밀려오는 시리고 쓰린 시간의 인내라는 파도와 대면합니다. 그 파도를 통과하는 동안 몸은 잠시 녹슬지만 정신만큼은 정금처럼 단단해져 그것이 강하고
지혜로운 인생을 완결시키는 것이지요. 글을 쓴 이병률 시인은 시와 여행 에세이를 쓰는 작가입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좋은 사람들’로 등단했으며, 그가 쓴 여행 에세이 <끌림>은 10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로 많은 이에게 끌림과 여운을 전했습니다. <끌림>에 이어 낸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도 큰 사랑을 받았으며, 시집으로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