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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8월 항상 최선을 생각하는 당신께 (하지현 교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번 고민한다. “이게 최선일까?” 누구나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기를 절실하게 바란다. 행동에 옮기기 전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심사숙고한다. 과거의 경험, 주변의 상황 변수, 지금 가진 자원을 종합해서 최선이기를 고민한다. 답이 쉽사리 나오는 경우는 안타깝지만 흔치 않다. 처음에는 내 경험과 아는 것이 적어서 그런 줄 안다. 그러나 세칭 ‘경험치’라는 것이 늘어도 여전히 최선의 선택은 어렵다. 아니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보고 듣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실패의 두려움도 커지고 더 좋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해진다.

나도 그랬다. 언제나 이게 최선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 이게 최선이라고 믿은 일도 원하는 대로 실현된 적은 없는 것 같다. 도리어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의외로 꽤 만족스러운 결과로 드러날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최선’으로 선택한 일이 확실히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물론 최선의 선택이 매번 만족도가 더 높은 것은 아니었다. 만일 한 여성이 배우잣감을 염두에 두고 이성을 만나려 한다고 치자. 만나는 남성이 좋은 학력에 괜찮은 직장에 훤칠한 외모, 서글서글한 성격…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집안을 보니 넉넉한 듯하고, 게다가 차남이란다. 더 들어보니 부모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꿈에 그리던 이상적 결혼 생활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사귀어보니 종교적 신념이 무척 확고해서 타협하기 어렵거나, 머리가 너무 좋아서 무조건 자기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내 마음 한쪽에서는 그 정도면 참고 살아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인일 수도 있다. 최선만 바라봤고, 막상 거기에 근접한 사람을 만났을수록 앞으로 부딪히게 될 것은 실망스러운 일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완벽하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것인가.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지? 내 조언은 생각하는 순서를 바꿨어야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선택지는 최선-차선-차악-최악의 딱 네 가지다. 당연히 관성적으로 최선을 먼저 보고 치열하게 고민을 한다. 그게 지금까지의 습관이다. 시험을 보면 1백 점을 받고, 달리기를 하면 1등을 할 길을 찾는 것처럼.

하지만 인생의 선택에서는 그게 썩 효과적이지 못한 듯하다. 출발점에서 하나의 방법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 길을 가는 과정에 무수히 많은 우연과 의외의 변수가 등장한다. 출발점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처음 기대한 것과는 무척 다른 궤적을 그렸기 일쑤다. 출발점에서 최선이라 선택하고 가는 길에 돌발 변수가 튀어나왔는데도 처음의 방법만 고수하다가는 완주를 못 하거나, 실패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출발점에서 최선이라고 여기고 나아갔을 때 처음에 그려본 목적지 그림과 100% 같은 모습이 될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현실의 삶이 이렇기에, 이제는 선택에 앞서 ‘최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마음의 에너지를 투자해보면 어떨까? 미지의 결과물인 최선을 찾는 것보다, 가능한 한 최악의 상황이 생길 만한 변수를 골라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고 더욱 중요한 일이다. 최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 일단 든든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신체 증상이 있을 때 그게 악성 종양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최악이 아닌 것은 사실 차선 아니면 차악이다. 그건 무엇이든 손에 쥐는 게 있는 게임이 된다. 또 하기에 따라서는 나중에 목적지에서 보면 “아 이게 최선이었네”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오래 하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 마음이 끌리는 것’을 선택하자. 그래야 질기게 오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하다 보면 남 눈에는 안 보이는 길이 보이고, 진짜 내 것이라는 애착이 생긴다. 그러면 나나 남들이 모두 그게 최선이라고 인정할 확률은 자연히 올라간다. 나는 그게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고르려 애쓰기보다 최악이 아닌 것 중에서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최선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는 현실적 방법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눈의 시야각이 ‘최선’이라는 각도에 머물러버린 건 아닐까요?
좀 더 옆으로 시야각을 넓힐 수 있다면 차선과 차악도 볼 수 있어 하지현 교수의 조언처럼 최악이 아닌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텐데요. 글을 쓴 하지현 교수는 건국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사람의 심리를 치유하는 의술이라는 지성과 필력이라는 감성을 겸비했습니다. <심야치유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 의학 에세이> <사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다>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되었고, 최근에는 <예능력>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책을 출간해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우리 마음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는 힐링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