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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숨을 데, 숨 쉴 데 (전성태 소설가)

올 어버이날에는 열 살 된 큰아이에게 처음으로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학교 숙제로 쓴 편지인 만큼 서두에 적은 인사말은 낳아주고 길러줘서 감사하다는 빤한 소리였다. 그나마 내가 아이의 육성을 느끼며 진정성 있게 읽은 부분은 편지 말미에 붙인 부탁이었다. 아이는 두 가지 요구를 엄마 아빠가 들어주었으면 했다. 식탁에서 “조금만 더 먹어!” 하는 소리를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숙제하라는 훈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도 여전히 “숙제 빨리해!” 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고쳐달라는 것이다.

당장에 무슨 물건을 사달라는 것이 아닌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두 가지 요구 모두 만만찮았다. 부모로서는 웬만한 철학을 지니고 노력하지 않으면 일상에서 지켜내기 어려운 보육 문제를 아이는 요구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지금 이 두 가지가 가장 스트레스 받는 문제라고 토로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아이는 우리가 과거에 걸어온 길,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래서 무감각하게 지나칠 수 있는 성장기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 문제로 아이와 우리 부부는 앞으로 족히 10여 년은 투덕거릴지 모른다.

문우 김별아 소설가가 최근 한 일간지에 쓴 칼럼에서 흥미로운 사연을 접했다. 그녀의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옆 야산에 두 사람이 겨우 들 만한 땅굴이 하나 있는데, 이 학교 졸업생 두 명이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3 수험생들은 8개월 동안 틈틈이 4017L의 흙을 팠다. 김별아 씨는 이 땅굴을 도망쳐 숨을 데가 없는 아이들의 은신처이자 안식처라고 소개했다. 나는 이 사연을 접하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할 게 없는 내 유년기 시절의 눈여길 만한 특이점이라면 내가 땅굴 파기의 명수였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집 뒤꼍 언덕에 호미를 댄 이래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장장 7년 동안 동산 여기저기에 줄기차게 굴을 팠다. 방과 후 일과를 굴 파기에 바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만큼 땅굴을 파고 은폐하는 데 꽤나 노하우가 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을 고르고, 굴 파는 데 최대 장애인 암석이나 돌 따위가 많은 지형을 피해야 한다. 땅굴을 파면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흙을 뒤처리할 수 있는 지형을 고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 흙더미로 땅굴이 발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슬거리는 마사 토질은 땅을 파기는 쉬우나 붕괴 위험이 높다. 언덕배기에 바로 판 땅굴보다 평지를 파고드는 L자형 땅굴이 은폐하는 데 용이하며, 작업 속도를 높이려면 평지에 넓게 구덩이를 파고 그 위를 나무와 흙으로 덮는 방식이 좋다. 땅굴 주위에 억새를 심으면 은폐하는 데 용이하고 겉흙의 유실도 막을 수 있다….

남들 눈에는 무모하고 쓸데없는 짓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두 수험생이 굴을 파면서 느꼈을 희열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굴 파기는 침묵한 채 몰입하면서 하게 되는 단순노동이다. 하루하루 넓어지는 땅굴을 보면서 느끼는 성취감은 문제집 한 장을 해치울 때보다 뚜렷하다. 엉덩이를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큼 팠을 때 그 습습한 공간에서 내다보는 하늘은 마치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 같다. 침묵의 심장부에 가까워진 듯 땅굴에서는 제 맥박 소리가 돌올하다. 땅굴에 누워 쉬어보는 숨처럼 제 것 같고 고른 숨도 없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실상 굴 파기가 자신의 내면을 한 뼘씩 넓히는 일이었다는 걸 말이다. 꿈꾸며 다가가는 과정에서 모든 즐거움을 누렸을지 모른다. 실상 내가 요즘에도 세상 한 귀퉁이의 한갓진 곳을 기웃거리는 것도 숨어서 숨 쉴 땅굴 하나 갖고 싶은 심리가 아닐까. 내가 이 나이에 삽을 들고 다시 땅굴을 판다고 산속으로 든다면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까? 그러고 보면 미스 김이 담배 한 개비 들고 오른 옥상이라든가 저 심야의 불빛 깜박이는 고층 아파트 베란다도 지금 땅굴 속이겠지.

여러분은 숨 쉴 땅굴 하나를 마련해 두었나요? 하늘 한 뼘 쳐다보는 일이 특별해진 요즘, 8개월간 땅굴을 팠다는 수험생처럼 내 마음이 쉴 땅굴 하나 마련해야겠습니다. 소설가 전성태 씨의 말처럼 그 과정조차 즐거움일 테니까요. 글을 쓴 전성태 씨는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신동엽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를 썼으며, 소설집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과 산문집 <성태망태부리붕태>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