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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 나이에 무릎을 꿇게 (전성태 소설가)

나이 마흔은 생의 전환기 건강검진 안내장과 함께 온다. 국가가 이런 방식으로 나이를 공인해줄지 몰랐다. ‘생의 전환기’라는 용어가 매정하니 바꿔달라고 의료보험공단에 진정해야겠다고 넋두리하는 사람도 있다. 신체의 대사와 활동량이 줄고 호르몬 분비에도 변화가 생겨 각종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나이에 이르렀다는 소리일 테지만, 공단의 안내는 마흔들에게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통고하는 것처럼 들린다. 키가 미세하게 준 것 같다. 시력 검사를 받을 때는 침이 꼴딱 넘어간다.

병원을 한 바퀴 돌며 채혈, 복부 초음파, 흉부 엑스레이 촬영, 심전도, 위내시경 검사까지 받고 나면 심리 상태는 거의 환자가 된다. 대기실에서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처자식도 생각하고 친구들도 떠올려본다. 신체 각 부위들에 조금씩 경고등이 켜져 있다. 여러 지표들이 예상치보다 더 나쁘거나 나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제 몸을 살피고, 생활을 살피고, 급기야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들이 유독 ‘사십 세’를 제재로 작품을 많이 남기는 걸 보면 인생 마흔이 생의 어떤 전환기임에는 틀림없다. 故 고정희 시인은 “사십 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라고 노래하고 돌아서서 생의 끈을 놓쳤고, 안도현 시인은 “시절이 갔다, 라고 쓸 때/ 그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고 허탈해하며, 박후기 시인은 “마흔 살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이생을 가로질러 빠르게 날아가는 새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며 이마를 짚는다.

심지어 마흔이 불혹이 아니라 부록으로 들린다는 하소연도 있다. 마흔이 되기 전, 주위에서 종종 마흔 고개 넘는 고충을 토로할 때 그저 숫자 놀음에 사로잡힌 엄살이려니 싶었다. 나이 듦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거나 짐짓 인생 관조를 탐하는 욕심이겠거니 생각했다. 사람이 나이를 삼십 대, 사십 대 하고 십진법으로 끊어 셈하는 버릇이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손가락 열 개가 접혔다 펴질 때마다 인생이 고개이고 고비 아닌 적 없잖은가. “나이 모르고 삽네” 하는 말도 따지고 보면 나이에 매여 산다는 역설일 것이다. 나는 마흔 살을 거뜬히 넘겼다. 마흔하나, 마흔둘도 물수제비 뜬 조약돌처럼 건넜다.

그러나 마흔세 살에 덜컥 걸려 넘어졌다. 일단 원고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쩔쩔매는 일이 많아졌다. 밤샘 작업이 불가능해졌고, 능률이 예전만 못하다. 내 능력이 이뿐인가, 나도 이제 녹슬었나. 슬럼프는 늘 있어왔지만, 이건 성질이 다르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실상 나는 이미 제 몸에서 그리고 생의 깊은 곳에서 앓는 징후를 감지하고 있었을 거다.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지 않았는가. 불편한 사람, 부당한 일에도 퍽 너그러워진 태도에서 문득 나는 굽실거리는가 하고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던가. 긴 세월 나는 단 한 편을 남겨도 좋다고 소리치고는 했다. 직진만 표시된 지도를 가지고 달려왔다.

유턴지점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글쓰기도 몸을 부리는 노동이라는 것, 많은 걸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문학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인생에 단 한 편은 없다는 것. 인생의 달인 같은 선배에게 ‘마흔고개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토로했더니 껄껄 웃었다. “나는 그때 생긴 병을 오십을 넘겨서도 못 떨치고 있다네. 아무튼 나이에 무릎을 꿇게.” 인생에 달인이 있을 턱이 없다. 다만 짐작한다, 겸손한 실패만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마흔’이란 고개는 여전히 화두인가 봅니다. 나이 듦이야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라지만, 몸의 신호를 보면 서럽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소설가 전성태 씨는 고속도로 같은 우리 인생길에도 갓길과 유턴 지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정하는 순간 전환점은 오기 마련이니까요. 글을 쓴 전성태 씨는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신동엽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를 썼으며, 소설집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埋香>과 산문집 <성태 망태 부리붕태>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