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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프리지어와 레몬 (박영택 교수)

나는 차가운 계절이면 프리지어꽃을 화병이나 물컵에 꽂아둔다. 열매인지 꽃인지 언뜻 구분이 가지 않는 그 노란색 꽃을 무척 좋아한다. 집사람과 연애하던 시절에는 한 번씩 프리지어꽃을 사 들고 갔다. 가난하던 그 시절에 프리지어꽃은 내가 전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그 꽃 틈으로 그림과 글을 섞어서 보내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리지어를 보면 온몸 안에 옛 생각이 마구 엉킨다. 덤으로 노란 수선화도 좋아해서 자주 사는 편이다.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수선화를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수선화는 새하얗고 고결한 모양새와 청초한 향기가 선골의 풍모를 지녔다 해서 조선시대 문인 사대부에게 두루 사랑받은 꽃이다. 나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수선화와 근원 김용준이 그린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수선화는 매화와 마찬가지로 추운 겨울에 피기에 절개와 굳은 의지, 맑고 깨끗한 정신을 상징한다. 그러나 수선화는 키우고 보듬는 데 손이 많이 가고 쉽게 시들어서 아쉽기만 하다. 프리지어 역시 그렇다. 하여간 노란 꽃들이 책상 위 한쪽에 피어 있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 가을이면 모과를 여러 개 사서 접시에 올려둔다. 모과 향이 방 안 가득 퍼지면 마음이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놓아둔 모과가 시커멓게 썩고 곰팡이가 필 즈음이면 내다 버리고 다시 모과를 구해다 놓는다. 이것은 어떤 의식과도 같다. 그런데 사계절 내내 갖다 놓고 교환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레몬이다. 슈퍼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나는 비닐에 담겨 있는 세 개들이 레몬을 잊지 않고 사는 편이다. 어쩐지 그 레몬이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서 그저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레몬을 즐겨 먹는 게 아니라, 오로지 보기 위해 완상용으로 산다. 생각해보니 모두 노란색 꽃과 과일들이다. 노란색 자체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과일과 꽃은 노랑이 좋다(단, 참외는 예외다).

모든 과일 형태는 경이로울 정도로 완벽하다. 둥그렇게 마감된 생명력이 놀랍고 신비할 따름이다. 과일들은 한결같이 둥글고 좌우대칭이며 형언하기 어려운 색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지닌 궁핍한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색채는 불가사의할 정도다. 자연만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과일과 꽃과 열매가 경이롭다. 그중 레몬의 타원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냥 신기하다. 저 형태와 색상은 어디서 왔을까? 노랑으로 뒤덮인 견고한 껍질의 촉감, 피부처럼 반질거리는 질감, 표면에 자리한 선점, 양 끝으로 자리한 넓적하고 조그만 돌기 부분의 흥미로운 생김새 등이 내가 레몬에 반하는 이유다. 비교적 적은 돈으로 레몬을 사서 책상에 놓아두고 보노라면 무척 행복하다. 사실 행복을 잘 모르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 내게 잠시나마 행복한 기분 같은 것을 전해주는 것은 그 레몬을 보고 있을 때다. 그러니 나에게 레몬은 구원 같다.

이런 내 취향을 아는 한 학생이 스승의 날에 레몬 수십 개가 가득 든 바구니를 선물로 주었다. 연구실 곳곳에 레몬을 늘어놓고 좋아한 기억이 난다. 한 손에 쥐어지는 작은 레몬의 몸, 자신의 존재성을 견고하게 지시하는 껍질, 눈부신 노란색, 아주 작지도 크지도 않아 완벽하게 내 손과 시선에 조응하는 레몬의 육체가 나에게는 무척 감각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레몬의 꽃말은 ‘열의와 성실한 사랑’이다. 성실한 사랑은 나와 무관하지만 생각해보니 어떤 열의는 나에게 조금은 있는 것 같다.

마당에 레몬나무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옆에 모과나무와 대나무, 매화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그 주변 어디엔가 수선화도 키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내 평생에 그런 정원을 가질 리는 만무하다. 대신 제철에 수시로 프리지어꽃과 수선화 그리고 모과와 레몬을 사들여 내 눈앞에 성찬 같은 풍경을 안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만으로도 잠시나마 현실에 부재한 어떤 행복한 시간을 갖고 있다. 저 꽃과 과일이 없었다면, 저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인 노랑이 없었다면 내 생애는 그것의 부재만큼이나 결핍되어 지냈을 것이다.

쇼핑은 일반적으로 효용의 가치를 사는 것이고, 사람은 보통 필요가 충족되면 만족감을 얻습니다. (부케나 졸업식장 꽃다발이 아닌) 꽃과 관상용 레몬은 필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우리는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에서는 행복을 찾기 어렵습니다. 행복과 무관하게 어차피 사야 했을 테니까요. 꽃은 그런 의미에서 큰돈 들이지 않고 행복을 사는 길입니다. 가끔은 행복은 구입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에 더해 ‘관상용 레몬’을 알려준 박영택 교수는 경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미술 평론을 합니다. <미술 전시장 가는 길>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 등 미술에 관한 책과 <수집미학> <하루> 같은 편안한 에세이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