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2007년 04월 사랑은 추상이 아니다 (김서령 칼럼니스트)

겨우내 명태 난젓과 안동식혜를 끊이지 않고 먹었다. 떨어질 만하면 택배가 왔다. 명태 난젓은 생명태를 무와 함께 난도질해 ‘갖은 양념’ 한 반찬이고 안동식혜는 일반 식혜를 끓이기 전에 고춧가루와 무를 버무려 삭힌 식혜다. 둘 다 시원하고 칼칼하고 입 안에서 아삭아삭 씹힌다. 먹을수록 인이 박인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 말고는 이런 음식을 아는 사람조차 없다. 손 많이 가는 이것들을 만들어 밀폐 용기에 담아 비닐로 싸고 또 싸서 내게 부치는 분은 나이 드신 고모다.

고모는 ‘세상 신기흔(신기한) 게’ 두 가지 있다고 늘 감복해하신다. 그 하나가 텔레비전이라면 다른 하나는 택배다. 전화만 돌리면 택배기사가 집까지 와서 부칠 물건을 덜렁 들고 가주니 이보다 희한한 발명이 또 어디 있겠냐며 택배기사에게 허리 굽혀 절하시고 그가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고 서 계신다.

고모는 아버지의 손위 누이다. 1925년생이니 올해 여든셋이 되셨다. 고모 인생은 우리 현대사의 축약이다. 아니 축약이 아니라 고모 몸속에는 조선 중기쯤의 시간이 들어 있는 듯하니 확장이라고 해야 맞겠다. 고모가 나고 자란 1930년대 산골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2007년 서울은 그만한 간극이 벌어져 있는 게 확실하다. 저 난젓과 식혜는 그런 시간을 뚫고 택배기사를 통해 내 손에 전해진다.

고모는 열여덟에 혼인했다. 남편은 ‘사상 가진 사람’이었다. 혼인 후 얼마 되지 않아 투옥됐고 전쟁이 나 옥문이 열리자 월북해버렸다. 같이 산 기간은 열 달이 채 못 되었지만 고모는 17대를 봉사하는 큰 종가의 엄연한 종부가 됐다. 층층시하, 숟가락 드는 식구가 스물일곱인 대가의 부엌살림과 불천위不遷位를 포함해 한 해 열두 번의 제사가 평생 남편도 자식도 없는 고모의 몫이 됐다. 고모의 시부이신 사장 어른은 99세를 사셨다. 70대의 며느리와 90대의 시아버지가 5백 년 묵은 고가에서 5백 년 전과 똑같은 모양새로 살아가는 모습을 나는 안동에 갈 때마다 목격하곤 했다. 이제 어른도 돌아가시고 제사도 고모 손을 떠났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고모는 고모가 아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여전히 안팎을 돌아치며 무언가 일을 만드신다. 좀 쉬시라고 강권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죽으면 썩을 손, 놀려두면 머 하노?” 그게 말하자면 고모의 이데올로기다.

가을 무가 좋으면 명태를 난도질해 난젓을 담그시고 고운 고춧가루를 우려 식혜를 삭히신다. 먹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당신 입에 넣자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고모는 얼른 전화해 택배를 부르신다. 한 보따리 펼쳐진 택배 박스 안에는 별의별 게 다 들었다. 사탕, 무, 가지, 콩나물, 대추, 참깨, 검정콩, 세어보면 늘 스무 종류가 넘는다. 나는 그걸 하나하나 깨문다. 깨무는 것마다 애정 같기도 눈물 같기도 한 맛이 찝찔하게 입 안에 고인다.

고모와 나는 이름이 같다. 고모는 후웅, 나는 그걸 뒤집은 웅후! 숫 웅雄자가 씌어진 가부장제에 철저히 복무하는 이름이지만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다른 세상을 살았다. 나는 남편이 있어도 시댁에 무조건 봉사하지 않았고 아이가 있어도 고모가 내게 보낸 애정의 절반 분량도 쏟아 붓지 못했다. 무엇보다 하루 치 노동량이 고모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사랑은 추상이 아니다. 구체적 노동 없이 말로만, 눈으로만 전달될 수 없다. 남동생의 딸에게 나는 어쩌다 만나는 낯선 사람일 뿐 살갑고 아까운 피 같은 고모가 아니다.

이래놓고 내가 고모더러 어리석다고 핀잔할 수 있을까. 부가 커질수록, 학습량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제 몸에서 길어 올릴 애정의 절대량이 부족해지는 것 같다. 한 세대 만에 세상을 오가는 애정의 총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건 아닌지 의심한다. 하긴 아이를 한둘밖에 낳지 않으니 다음 세대에는 고모라는 호칭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고모 없인 살 수 없다. 뜨거운 밥에 난젓을 올려놓고 고모에게 전화해 버럭 소리 지른다. “제발 택배 좀 그만 보내세요. 이러다가 고모 안 계시면 날더러 어쩌라고!” 고모는 쩔쩔매며 대답한다. “야야, 내 안 죽을끄마. 죽으면 썩을 손, 놀래믄(놀려두면) 뭐 하노?”

어린 시절 친지들에게 웅후라고 불렸던 칼럼니스트 김서령 님의 이야기로 4월을 시작합니다. 이제 웅후라 불리는 일이 거의 없는 그를 고모님께서는 지금도 웅후라고 부르십니다. 당연하게도 ‘웅후야’ 하고 부르는 목 소리에 영혼을 깨우는 따뜻함이 들어 있겠지요. 말 한 마디에도 사랑을 드러내는 고모님처럼, 자애로운 사랑의 화신이 되기를 소망 하는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