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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드릴 말씀 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칼럼명도 찰떡같은 이 한 페이지짜리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회 명사의 솔직한 일기장 같아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칼럼입니다. 당연히 필자 섭외에도 공을 많이 들이지요. 편집장인 저도 정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쓰려고 그간 꼭꼭 아껴두었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 이 칼럼의 필자가 되는 날이네요.

 

저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편집장 일을 마칩니다. 기자로 일하다 2011년 3월호부터 편집장을 맡았으니, 2023년 2월호는 제가 편집장으로 펴내는 1백44번째 <행복이 가득한 집>입니다. 정확히 12년을 꽉 채웠네요.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김없이 새 아침이 밝아오는 것처럼 매달 제 앞에 선물인 듯 숙제인 듯 주어진 <행복>을 채워나가며 수많은 인생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인생의 한 챕터를 남다르게, 의미 있게, 재미있게, 아름답게, 특별하게 채워온 분들을 저희의 취재원으로 모시니까요. 제게 <행복>은 단순한 종이 잡지가 아니라 격格이 있는 유기체 같습니다. 때론 별걸 다 아는 교양 있는 언니처럼, 때론 토닥토닥 고민 상담해주는 친구처럼, 때론 따라 하고 싶은 센스쟁이 전문가처럼, 때론 말없이 밥 한 끼 차려주는 선배처럼… 말을 걸어왔거든요. 가족, 일, 집, 친구, 문화, 사회, 사랑, 쉼, 죽음, 꿈에 관해, 그리하여 나에 관해 성찰하게 하는 질문을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던져주었습니다.

 

얼마 전 TV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평생 괴테를 공부한 노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어야 할 두 가지가 있다고요. 그것은 바로 ‘날개와 뿌리’랍니다. 딸 키우는 엄마로서 반성하는 부분이 많아 더 그랬겠지만, 그 두 단어가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날개와 뿌리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건 아닐 거라는 데 생각이 가닿았습니다. 40대를 살아갈 30대에게, 60대를 살아갈 50대에게도 건강한 날개와 뿌리는 분명 필요합니다. 12년간 1백44권을 한 장 한 장 두세 번씩 꼼꼼하게 읽으며 간접경험한 멋진 인생은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 저의 뿌리를 좀 더 탄탄하게, 저의 날개를 좀 더 힘 있게 만들어준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행복>이 저에게 그리해준 것처럼 독자에게도 삶에 득이 되는, 구독할 이유가 있는 잡지였기를 소망해봅니다.

 

지난달 놀랍게도 <행복이 가득한 집> 0호를 실물 책으로 기증받았습니다(조선대학교를 정년 퇴임한 한선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창간을 두 달 앞둔 1987년 7월에 발행한 ‘희귀템’ 창간 준비호라니요! 책 앞쪽에 실린 발행인이자 편집인 이영혜 대표의 창간 메시지를 읽으며 당시의 초심을 35년이 지난 지금의 <행복>에 겹쳐보았습니다. “생활의 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사람의 정다운 벗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로 끝맺는 여덟 가지 약속은 시대상에 따라 사라지거나 희석된 것이 있긴 해도 본질은 변치 않았더군요. <행복>이 이토록 견고한 까닭은 저만치 앞서서 나침반과 지도 역할을 해준 발행인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라는 것도 압니다. 또한 저와 함께해준 기자들, 콘텐츠를 함께 만들어준 최고의 스태프 덕분이라는 것도요. 돌이켜보니 저는 운이 참 좋았습니다.

 

이제 저는
회사의 배려로 3월부터 조금 긴 휴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통을 이지현 새 편집장에게 넘깁니다. <행복> 기사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익숙한 이름일 텐데요, 과거 주거문화팀에서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베테랑 기자입니다. 의욕적이고 부지런할 뿐 아니라 인맥도 넓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누구보다 이 잡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큰 후배라 차기 편집장을 물색할 때 의심 없이 후보에 이름을 올렸지요. 그간 잡지 생태계가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새 편집장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만큼 <행복>에도 긍정적 변화가 생길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때론 마감에 치이고 때론 해결하지 못한 업무에 아등바등하며 ‘행복이 아득한 집’이라고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지만, 매달 <행복이 가득한 집>의 첫 번째 독자로 지낸 12년이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편집장 구선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