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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2월 불필요하게 불행해지지 않기

청년들은 불행하다. 청소년들은 불행하다. 청년이 화두가 된 시대에 이런 말은 이제 마치 상식과도 같이 통한다. 청년은 시대를 막론하고 힘들다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부터 지금의 청년 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라는 분석을 덧붙이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한국의 청년층이 이전 세대는 결코 누릴 수 없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성장한 세대라는 점은 이런 논의 속에서 종종 망각되곤 한다. 사실 2022년의 삶이 불행하다고 하더라도, 1962년의 혹독하던 절대적 빈곤에 비하면 편안하고 안락하게 다가올 것이다. 

 

자연스레 왜 요즘 청년들은 풍요 속에서 불행을 느끼는지 의문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의문부터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애당초 풍요와 행복은 직결되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핍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거나, ‘부족해도 행복해’를 외쳐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행복의 필수 요소는 물질보다는 심리적 차원에 더 닿아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감사할 수 있는 태도, 주변인과 맺는 우호적 관계, 몰두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의 존재 같은 것들이 물질적 풍요보다 행복을 더 잘 보장해주는 듯하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문명의 물질적 발전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이 행복의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헤집어놓는다는 데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만들어낸 초연결 시대에 사람들은 SNS를 바라보며 남들이 잔뜩 부풀려놓은 장면과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비교하고 불행을 느낀다. 즉각적이고 얕은 소통이 일반화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깊은 관계는 희박해진다. 쏟아지는 콘텐츠는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며 차분하고 깊이 몰두할 대상에 눈을 둘 수 없게 한다. 이런 기술적 변화와 함께 성장하며 인격을 만들어간 청년들은 이제 불행을 당연하게 여긴다. 

 

거기에 기술 발전이 기성세대로 확산되면서 ‘우울한 온라인’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기술 비관론’ 자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0세기 말은 기술 비관론의 전성기였다. 세기 전환기의 기술 낙관론은 그런 비관론을 몰아내며 부상했다. 어쩌면 기술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지, 침해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일 수 있으니, 지금의 비관론 또한 금세 사라지고 인간은 기술의 힘으로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 삶을 뒤흔든 정보 기술이 우리의 정신을 흩트리고 행복을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떨어트려 왔다는 사실만큼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기술과 위험한 동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야수에 잡아먹히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해질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불필요하게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글 임명묵 | 담당 최혜경 기자

 


2021년 연말 신문과 대형 서점들이 ‘올해의 저자’로 임명묵 님을 선정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논객’이라 상찬하길래 그가 쓴 <K를 생각한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들여다봤습니다. ‘당사자 입장 세대론’으로 90년대생을 해부한 글은 그 세대에 대해 의아해하던 것을 풀어주었고, 새로운 계절 2월의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에 그만이다 싶었죠. 그는 1994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및 중동 지역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문명과 역사, 사회와 국제 정세, 대중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서울신문, 매일경제, 시사저널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중입니다. 저서로 덩샤오핑 시대에서 시진핑 시대로의 전환을 다룬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