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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거창한 바다와 단순한 삶

정류장 뒤로 파도가 부서진다. 하얀 포말 앞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제주에 온 지 2년, 나는 아직도 바다에 놀란다. 버스 정류장이, 다이소가, 스타벅스가 바다 앞에 떡하니 있는 풍경이 내겐 초현실적이다. “살아보니 제주 어떠냐?”고 지인들이 묻는다. 저 거대한 생명력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고 산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하지만 내가 달라진 것이 더 감사하다. 백화점이 없어서 서울로 돌아갔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무언가 조금씩 부족해서 만족한다. 백화점 옆 살림집, 도심 속 작업실의 서울살이와 달리 제주살이는 소박하다. 사는 이도, 건물도 나이 먹은 제주시 구도심. 빵집이라곤 사거리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 단 하나지만, 내겐 서울의 대단한 디저트 가게보다 더 큰 기쁨이다. 모 백화점 수선 센터 뺨치는 구두 수선집과 옷 수선집도 동네 골목에서 찾았다. 아침 일찍이면 수협에서 막 들어온 생선을 구입한다. 초등학생 딸아이는 과외나 학원 공부 대신 도서관에서 2주에 열 권씩 책을 빌린다.  

 

제주 생활은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고, 그 밖의 부수적인 것이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지 않도록 도왔다. 자연스레 생활 반경은 확 줄었다. 목적을 향해 멀리 가지 않아도 부족한 대로 얼추 해결할 수 있는, 있을 게 다 있는 작은 세계. 객관식 선택지가 적은 세계(물론 잘 찾고 잘 골라야 한다). 이곳에서 나는 정말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게 됐다. 가족과 창작과 친구들. 아는 사람도, 모임도, 행사도 적으니 그들에게 향한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됐다. 매일 밤 시간을 정해두고 남편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평생 같이 걸어갈 사람과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법, 더 사랑하는 법을 이곳에서 배우는 참이다. 아이는 헐렁해진 일상을 만끽하는 중이다. “내가 옛날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래서 그때 키가 안 큰 거야.” 그 시절을 어른스레 회상할 줄도 안다. 뭣보다 아이는 이제 자신의 일상을 과거형 대신 현재 진행형으로 들려줄 줄 안다. 나도 헐렁해지고 아이도 헐렁해지게 한 시공간 덕이다.  

 

그리고 친구들. 새로 업데이트되는 인연보다 오래 지킨 우정이 이제야 더 진하게 ‘음미’된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그냥 지인인지도 보게 된다. 내 친구들은 안다. 지금 내 마음이 더 가까이, 차분히 그들  곁에 있음을.  무엇보다 나. 서울의 나는 늘 종종거리며 작업실에 출퇴근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이 내 작업에서 뭘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챘고, 그것에 길들여졌다. 언제부터인가 내 속에서 샘물도 불꽃도 일지 않았다. 제주에 오면서 창작을 멈췄다. 20여 년 동안 당연한 듯 드나들던 작업실에서도 벗어났다. 내 속에서 무언가 솟아오를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열흘 전 작업실을 새로 냈다. 이제 내가 뭘 원하는지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사람들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꽃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을 배짱. 매일 아침 바다가 준 힘일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후 해안을 달리고 돌아올 땐 손에 꽃이 한 움큼이다. 꽃이 양손에 가득 차면 운동화 끈 사이에 꽂고 달려온다. 가족에게 따뜻한 밥을 해 먹이고 작업실로 달려간다. 휘둘리지 않고 산만하지 않아서 좋은 세월이다.   

 

세밑이라 좀 평강한 글을 들려드리려고요. 2년째 제주에서 즐거이 타향살이 중인 백은하 작가의 물빛 일상이 딱이다 싶습니다. 말린 꽃잎 위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는 ‘꽃그림 작가’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2001년 <한겨울의 꽃도둑전>(관훈갤러리)을 시작으로 <겨울 풀밭전>(덕원갤러리),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경인미술관), <상상력과 호기심전>(인사아트센터) 등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글을 통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는 <너에게 花를 내다> <엄마 생각하면 왜 눈물이 나지?> <기차를 놓치고 천사를 만났다>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사자야, 전화 왔어> <꽃잎 아파트> 등을 펴냈습니다. www.baekeunha.com

 

글 백은하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