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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적반하장

외국 영화에서 본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기도를 하는 장면이었죠. “제가 그동안 선함을 베풀었던 것으로 지금의 고난을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이 저축된다고 암암리에 알고 있는가 봅니다. 언젠가는 꺼내 쓸 수 있다고 믿는 거죠. 누군가가 알려주었죠, 인도에서는 걸인이 뻔뻔하다고. 동냥을 주는 행위를 통해 적선, 즉 선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자기가 베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이럴 때 적반하장이란 단어가 맞나요? 역지사지가 더 맞는 건지요. 그래도 꽤 수긍이 갔습니다.

 

<12번째 솔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노르웨이에서 특공 임무에 실패하고 독일군으로부터 탈출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겨울 바다, 눈 쌓인 산속을 뚫고 총 맞은 발가락을 스스로 잘라가며 집요한 독일군의 추격을 피해 다니는 것을 보는 게 힘들어서 며칠에 걸쳐서 본 영화예요. 숨겨준 흔적이 발견되면 서슴지 않고 총살하는 상황에서도 숨겨주고, 더 멀리 보낼 때마다 먹을 것과 따뜻한 점퍼와 담요를 챙겨주잖아요. 그중 스키까지 주는 대목, 주인공이 스키만은 못 받겠다고 하자 “이것을 못 주면 평생 나를 용서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기다란 막대기 두 개로 된 스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그래요, 생각해보니 눈밭을 다니려면 스키는 그들에게 자전거나 자동차 같은 중요한 수단이던 것이네요. 하물며 도망 중인 주인공에게 스키는 촌각에 달린 목숨을 위해 훨씬 유용한 거죠. 난생처음 만났지만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 덕분에 그 군인은 살았고, 정부로부터 영웅 훈장을 받으면서 그가 말했어요. 자기가 살아 돌아오도록 도와준 보통 사람들, 그들이 진정한 영웅이라고요. 그가 이 말을 할 때 세상을 초월한 느낌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이 선함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가요. 자연계 동식물 중에서 태어날 때 가장 쥐여준 것이 없는 존재가 인간이랍니다. 대신 선함을 주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위대함을 만들어가게 한 것일까요? 소득이 늘면 행복감도 증가하지만 일정 이상이 되면 그로써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역설을 누구나 압니다. 돈 많은 외로운 사람은 또 한쪽의 재화인 관계재關係財를 쌓지 않은 사람이랍니다. 남과의 관계는 절대로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이 또한 오랜 시간 저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득을 쌓아가려고 자칫 외로움도 쌓아가는지 모릅니다. 숙제만 얼른 하고 나가서 놀려고 했는데, 막상 끝내고 나서 둘러보니 날이 저물어 놀 친구가 없는 거죠. 재화는 어쩌면 나중에라도 만들 기회가 있을 수 있지만, 관계재는 나중이 될수록 만들기 어렵게 한 것이 신의 오묘한 한 수입니다. 그러니까 재산은 셀 수 있는 것과 셀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한마디로 잘살려면 남들과 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거죠. 

 

<행복이 가득한 집>이 34년 전 9월에 첫 호를 발간했습니다. 이번 호로 4백9번째 발행합니다. 오래 단련한 전문성, 진정한 마음이 담기면 그것이 가구이든 채소 한 묶음이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치를 알게 되면 귀하게 여기기 마련입니다. 대부분 이런 세계는 겉으로 구별하기 힘들며, 작고 놓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런 물건, 장소, 사람을 발견하고 같이 느낄 취향, 정신, 아이디어… 이런 것을 담는 문화 창고 역할을 하고자 했습니다. 아름다운 것, 사랑할 만한 것에 대해 몇 줄이라도 붙들어 선한 사람이 지닌 정신의 풍요를 나누도록 노력하는 매체가 되고자 했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의 독자들이 부자가 되어도 외롭지 않은 관계 맺음을 우리 매체를 통해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남에게 잘해주자고요. 그걸 많이 저축해두자고요. 적반하장의 유효함!    

 


추신: 코로나19로 잠깐 정지된 지금의 시간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생산적 멈춤으로 승화해야 한답니다. 영화 몇 편과 책 몇 권도 결국 ‘나를 성장시킨 남들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굳건히 있게 해준 독자 여러분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 이영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