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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3월 우정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 (정이현 소설가)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주로 울다 말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렇다. 대책 없이 시작된 넋두리와 그 끝의 눈물바람을 죄다 받아주고 있는 수화기 너머 누군가. 때론 “울지 마, 바보야”라고 말해주기도 하고, 때론 “그래, 실컷 울어, 바보야”라고 말해주기도 하며, 또 가끔은 그저 침묵으로 가만가만 달래주는 친구. 그렇다. 몇 안 되는, 내 오래된 친구들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저녁, 그들을 만났다. 접선 장소는 얼마 전 새로 발견한, 탕수육과 삼겹살찜과 라면 안주가 놀랍도록 맛있는 우리 동네 술집이었다. (여길 처음 발견했을 때, 지구상에 이토록 보드라운 삼겹살찜도 있다는 걸 너희들한테 얘기해주고 싶어서 얼마나 신났는지 아니?) 와인 두 병을 빠른 속도로 나누어 마시면서 우리는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삼각지 명화원의 돼지고기 탕수육 튀김옷과 이곳 와규 탕수육 튀김옷 사이의 미세한 차이에 대하여, 우리 중 하나가 기어이 또 한 번 실패하고 만 연애에 대하여, 하루하루 지날수록 깊어만 가는 생의 불가사의에 대하여 우리는 떠들고 또 떠들었다. 웃고 또 웃었으며, 먹고 또 먹었고, 나누고 또 나누었다. 고백컨대, 내가 아는 한 토요일 저녁을 가장 유쾌하게 보내는 방법이다.

오랜 친구들이 없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운전하다 목적지를 찾지 못할 때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을 켜기 전에 전화기를 집어 들 일은 없겠지? 무턱대고 전활 걸어 “야, 얼른 네이버 들어가서 해운대에 있는 ‘삼천포 횟집’ 좀 쳐봐!” 하고 소리치는 친구를 위해, 경기도 분당 구석에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검색해주는 일도 없겠지? 그런 일들이 없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세상이 별안간 퍽 무미건조한 곳으로 느껴질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랫동안 나는 우정이 사랑보다 하위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다. 사랑에는 반드시 노력과 인내가 따라야만 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친구 간의 우정에도 그런 게 필요한 줄 몰랐던 거다. 그러나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정에도, 아니 우정에야말로 관리가 필요하다.

친구란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처럼 여겨질뿐더러 상대적으로 무심하기 쉽기에 특히 그렇다. 물론 우정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우정은 새로이 탄생하기도 하고, 늙어가기도 하며, 시름시름 앓기도 하고, 그러다 종내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다른 무엇도 아닌 내 게으름과 소홀함으로 잃게 된다는 건 몹시도 슬픈 일이 아닌가 말이다. 한때 뜨거웠으나 지금은 좀 멀어진 우정이라고 해서 걱정할 이유는 없다. 화양연화의 시절을 통과했던 우정, 아름답게 꽃피어 올랐던 한 시절을 함께 겪어냈던 우정은 그것만으로도 모자람 없이 충만하다. 혹여 인간지사 너머의 천재지변으로 인해 우정이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괜찮다. 맛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같이 나눈 친구들에게는 여한이 없으므로. 그 찰나의 기억만으로, 그를 떠올리며 평생 빙그레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감정의 본질에 관하여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수수한 내 친구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태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기운 없는 목소리만 듣고도 당장 내 마음 상태를 짐작하는 것, 어디서든 기꺼이 즉시 달려와 주는 것,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향해 나보다 더 큰 분노를 퍼붓는 것. 유치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가장 미숙할 때, 가장 연약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덥석 잡아주는 사람, 그게 바로 친구니까. 내 소중한 친구들의 이름을 새삼 천천히 불러본다.


푹 익은 친구처럼 밥맛 좋게 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없는 소리조차 웃고 또 웃게 만들고 무언의 말도 어색하거나 심심하지 않지요. 소설가 정이현 님의 우정론을 듣고 나니 이미 배가 부릅니다. 활짝 핀 시절을 함께한 우정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지 운 좋은 사람들이니까요. 정이현 씨는 <조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에 이어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