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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평범한 결혼 생활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쓰면서 ‘행복’이라는 주제를 티 나지 않게 피해왔다. 그와 관련해 쓴 거라고는 행복은 오로지 ‘찰나의 느낌’일 뿐이라는 것, 행복과 욕망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정도가 기억난다. 살아오면서 꾸준히 평온하던 시절이 없어서 행복이라는 개념을 어색해했다. 그러니 작년 12월 초, 이듬해 봄의 결혼기념일이 20주년임을 알아차렸을 때도 거추장스럽게만 여겼다. 원래도 기념일을 좋아하지 않는데, 결혼 20주년이라니. 세간이 근사하다고 인정해줄 만한 이벤트나 선물로 그간의 결혼 생활이 결코 불행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다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는 이 상황을 차라리 ‘일’로 둔갑시켜 ‘퉁치기로’ 결심했다. 결혼기념일에 맞춰 결혼 에세이를 직접 출판하기로 한 것이다. 잘 맞지도 않는 남자와 20년씩이나 꾸역꾸역 살아왔다는 자각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스스로를 더 바쁘게 만든 셈이다. 결혼 생활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가감 없이 담은 이 책을 읽고 격노한 남편이 나를 자유롭게 놔주는 상상도 해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기념일 당일까지 <평범한 결혼생활>의 출간 준비로 참 바빴다. 너무 정신없어서 정작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다가 광화문의 한 식당을 가까스로 예약했다. 맛없고 비쌌지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숙제를 해치운 양 후련했다. 밤공기도 제법 말랑해졌다. “참, 오늘 서점에 책 깔린 거 아냐?” 걸어서 귀가하는 중에 남편이 불쑥 물었다. “확실히 장담은 못 하겠어.” “지금 한번 가보자!” 그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시간은 바야흐로 밤 8시 반. 서점 안은 한산하고 고요했다. 에세이 코너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분명히 책은 없을 거라고, 허탕 칠 거라고 미리 실망할 준비를 했다. 

 

“오, 저기 있네.” 남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몇 달을 지지고 볶은 그 책은 미술관의 가장 귀한 소장품처럼 ‘에세이 신간’ 팻말 바로 옆, 그러니까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짜고 일부러 연출해둔 것처럼. “축하해요!” 책이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간지러운 감각이 회오리바람처럼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옆을 보니 남편에게도 비슷한 것이 스쳐간 듯했다. ‘향후 20년도 꼼짝없이 이 남자와 살게 되겠구나.’ 순간 그런 체념이 들었다. 2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수많은 풍경을 함께 봐오면서 웃고 울고 싸우고 끌어안았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 남자와 오랜 시간 꾸역꾸역 산 것이 뭐 그리 축하할 일인가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뭐가 또 그리 부대낀다고 책까지 써가며 계면쩍음을 모면하려던 것일까. 어차피 계속 이렇게 살 건데. 그렇게 체념하는데 묘하게 행복했다. 포기하면서 행복한 기분이 들다니, 결혼은 정말 이상하다. 

 

‘가정의 달’이고, 5월 21일 ‘부부의 날’도 있으니 올봄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산문 <평범한 결혼생활>을 펴낸 임경선 작가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언지 들어보자, 했죠. 우리에게 당도한 그의 글처럼 ‘체념하는데 묘하게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게 결혼 생활인 것 같군요. 다들 분별력 상실 때문에 결혼하고, 또 기억력 상실 덕분에 그 결혼 생활을 이어가나 봅니다. 이 짧은 글에서도 꾹꾹 밑줄을 여러 번 긋게 만드는 임경선 작가는 <가만히 부르는 이름> <태도에 관하여>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임경선, 요조 공저) 등 소설과 산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일과 사랑,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에 대해 쓰는 것을 즐깁니다. 광화문으로 이사한 후 1년째 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글 임경선(작가)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