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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다행多幸이다

새 책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출판사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하며 원고를 만지고 있었다. 나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자며 시작한 기획이었다. 경자년이 가기 전 책이 나오게 하자는 목표 아래 모두들 마우스에 불이 붙도록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팬데믹의 공포가 출판사를 덮쳤다. 출판사 식구들이 만나던 사람 중에 확진자가 나왔고, 나를 포함해 출판사를 방문한 모든 사람이 즉시 선별 진료소로 가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두 달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일요일 저녁에 그 전갈을 받고 밤새 내 머릿속에서 펼쳐진 그 긴박하고 무섭던 시나리오를. 만에 하나, 양성 판정을 받으면? 만에 하나, 증상이 발현되면?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면? 월요일 아침 검사를 받고 다음 날 결과를 통보받을 때까지 반복 재생되던 그 ‘만에 하나’의 불길한 상상은 다시 기억하기도 싫다.  

 

다행히 모든 사람의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왔다. 서로 전화로 검사 결과를 알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던 목소리. “다들 음성이래요! 다행이에요!”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모두 12일간의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모든 강제된 것은 불행을 부른다. 책도, 영화도, 음악도 위로가 되지 않던, 불행한 자가 격리 시간을 견디던 어느 하루, 친구의 전화가 왔다. “현관에 순댓국 걸어놨다. 난 바로 갈 테니까 좀 있다 내려와서 가져가.” 현관문에 걸려 있던 순댓국 포장을 기억한다. 그 순댓국이 내게 주던 위로를, 행복을 기억한다. 불행은 얼마나 순식간에 덮쳐오는가. 그리고 행복은 얼마나 사소한 것에서 터져 나오는가.  다행히 온라인이라는 방편이 있었기에 책 작업은 멈추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고, 원래의 목표보다는 늦어졌지만 어쨌든 세상에 나왔다. 작업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기에 실수와 오류를 더 잡아낼 수도 있었다. 다행이다.  

 

다행. 多幸. 살면서 한 번도 幸 자가 어떻게 생겨난 글자인지 궁금했던 적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드디어 궁금해졌다. 검색한 결과는 놀라웠다. 갑골문 시대의 幸 자는 수갑과 쇠사슬을 그린 상형문자였단다. 한자를 만든 지배 계층이 죄지은 자를 잡아 가두는 걸 다행한 일로 여겨 그런 문자를 만들어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음, 이런! 행복은 불행을 격리하는 것이었구나!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팬데믹의 시간, 불행한 시간이다. 그래도 불행을 읊조리며 보낼 수만은 없지. 바이러스를 격리하듯, 불행에 어떻게 수갑을 채워 격리할 수 있을지 상상하며 이 시간을 보내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따뜻한 전화 한 통, 문자메시지 몇 줄을 순댓국처럼 서로에게 전하자.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내 마음은 네 집 현관 앞에 달려가 있어, 그걸 기억해! 살아 있어 참 다행이야!   

 

행복은 불행을 격리하는 것이라니요! 상처에 소금 같기도 하고, 소독 같기도 한 이 문장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결국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겠죠. 1세대 배낭여행자, 캘커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의 자원봉사자로 깊은 울림을 준 조병준.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등 여행과 삶을 이야기하는 열몇 권의 빼어난 잡문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따뜻한 슬픔>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학교에서 문화를 공부한 여파로 문화 평론집 <나눔 나눔 나눔> 등도 썼고요. 디자인하우스에서도 20여 년 전 <길에서 만나다>라는 ‘넋두리 모음집’을 냈죠. 올 1월 5년 만에 새 책 <퍼스널 지오그래픽>도 출간했는데, 그 안에 <행복이 가득한 집>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글 조병준(시인, 문화 평론가)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