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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미소 지으며 사진 찍기

간혹 언론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인터뷰어 측으로부터 “옛날 사진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럴 때면 좀 난감해지는데, 우선 나는 옛날이고 지금이고 사진을 찍거나 찍히는 걸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서, 가지고 있는 내 사진이 썩 많지 않다. 독사진은 더 그렇다. 과거 필름 카메라 시대에 찍은 사진들을 디지털로 스캔한 것도 몇 장 없다. 예전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왠지 부끄러워져서 멀리하는 편이다. 그래도 인터뷰어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으니까 머리를 긁적이면서 하드디스크에 있는 몇 안 되는 예전 사진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곤혹스럽게 모니터를 쳐다보며 생각한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사진을 찍었을까?’ 10대와 20대에 찍은 사진 속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노려보고 있다. 

 

옛 흑백사진 속 인물들이 왜 그렇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터라 제대로 사진을 찍으려면 필름을 빛에 노출해야 하는 시간이 길었고, 모델이 그동안 같은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바람에 그렇게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루이 다게르가 혁신적 사진술을 개발해 큰 인기를 모았는데, 그때도 노출 시간이 20분이나 됐다. 이전까지는 여덟 시간이었다. 물론 내가 10대 때에는(디지털카메라는 보급되기 전이지만) 사진술이 얼마든지 움직이는 사물이나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정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사진 속 내 얼굴이 그렇게 굳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첫째, 소년 장강명은 평소에도 잘 웃는 녀석이 아니었다. 매사 불만이 많았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중2병을 꽤 오래 앓았다. 그 녀석을 카메라 앞까지 끌고 와서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웃게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둘째, 소년 장강명은 그런 주제에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 

 

특히 눈이 작은 게 문제였는데,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는 웃지 않으려 했다. 웃으면 눈이 더 작아지니까. 조금이라도 눈이 크게 찍혀야 잘생겨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진 속 내 얼굴은 20대 후반을 넘어가면서 점점 부드러워진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 같지는 않다. 사춘기가 지나가고, 비대하던 자의식도 좀 줄어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웃음의 힘도 깨치고, 외모도 받아들이면서 렌즈 앞에서 비로소 웃게 됐나 보다. 그리고 지금 내 눈에 청년 장강명의 얼굴은 웃기 시작하면서부터 확 펴진 걸로 보인다. 카메라를 든 어른들이 왜 그렇게 웃으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다. 여전히 나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을 찍어야 할 일이 생기면 눈 크기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활짝 미소 짓는다. 크지만 무표정한 눈보다 웃느라 가늘어진 눈이 훨씬 더 예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성형외과 광고 모델을 볼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얼마간 나이가 들어야 할 것 같다. 그 이해력을 성숙, 혹은 지혜라고 불러도 될까?   


우리도 장강명 작가처럼 카메라 렌즈 앞에서 웃는 것, 아니 미소 짓는 것 자체가 어색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얼굴로 베푸는 안시顔施는 사실 나 스스로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공대를 졸업한 뒤 건설 회사를 다니다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11년 동안 기자로 일하며 이달의 기자상, 관훈언론상, 씨티대한민국언론인 대상 등을 받았습니다.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 <표백>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장편소설 <댓글부대>로 제주 4·3평화문학상·오늘의 작가상,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 하는 방식>으로 문학동네작가상, 단편 ‘현수동 빵집 삼국지’로 이상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대중에게는 <한 국이 싫어서> <우리의 소원은 전쟁> <댓글부대> 등 한국의 자화상을 그리는 작가로 일컬어집니다. 

 

글 장강명(소설가)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