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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행복이 가득한 집

그렇게 오래 퍼부어도 되나 싶은 대단한 홍수, 까닭 모를 어마한 산불, 어쩌면 그리도 잘게 부수고 지나가는지 입이 딱 벌어지는 토네이도, 아프리카의 흙물을 먹는 가난…. 일곱 개 대륙을 지닌 이 큰 지구가 지구촌이라 불리는 것을 실감할 때가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볼 때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과 이를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한동네 일처럼 보게 되니까요. 창밖은 장대비에 젖고 안에서는 빗소리에 젖으며 이 글을 씁니다. 폭염 경보의 찜통더위가 너무나 힘들어 비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다는 남쪽 사는 두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산은 ‘억수로’ 덥고, 광주는 ‘허벌나게’ 덥다는군요. 어느 쪽이 더 더운 건지요. 인지심리학 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납니다. 어떤 상태를 전달하려는 이런 형용사가 숫자화될 때, 예컨대 부산은 34℃, 광주는 32℃라고 하면 우리 모두 두 지역의 더위를 가늠할 수 있으니 숫자의 발명은 하나의 지구에 일곱 개 대륙 이 속에서 우리 집 커뮤니케이션의 속도와 정확도를 올려놓은 인간 승리랍니다. 날씨, 온도, 밝기, 굵기, 비 내린 양…. 이런 것을 표현하는 숫자야말로 이성의 언어랍니다. 오래전 한국인인데도 한국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일본인 행세를 하던 간첩이 아주 뜨거운 주전자가 스칠 때 “앗 뜨거” 하는 말을 내뱉어서 탄로가 났다잖아요. 

 

철저하게 받은 일본어 교육 저 아래 엄마 배 속부터 익힌 언어가 본성처럼 잠자고 있던 것이지요. 우리 뇌 속의 본성, 즉 아직도 주먹만큼 자리 잡은 파충류 뇌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위협을 느낄 때 대피하거나 보호할 수 있게 작동한다고 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과자나 장난감을 눈앞에 보여주면 바로 풀어지는 감성은 강아지 정도의 뇌라고 합니다. 왜 울고 있는지를 체면도 없이 금세 잊는 아이는 맛을 알고, 주인의 도덕성이나 지식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 없이 충성하는 개는 먹이를 줄 때와 목 아래를  긁어줄 때의 손길을 아는 것입니다. 

 

감정은 기억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조금 여유를 갖게 되면서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뇌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감정에 덜 휘말리고 더 이성적이 되는 일이지요. 생각하기 싫으면 감정대로 하고 싶은 아이, 즉 강아지 뇌가 발현되는 거라네요.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를 훈련받고 강요받습니다. 요즈음 어려운 가운데 조금 기쁜 일이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인데도 여전히 발행하고 있냐며 놀라는 분도 계시지만, 이번 달로 창간 33주년을 맞는 <행복이 가득한 집>은 몇 달째 독자가 더 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이라고 분석합니다. 독자들의 손 편지도 늘었습니다.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직 우리 집은 비가 새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일요일이면 음악을 들으며 <행복이 가득한 집>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한지…. 이럴 때 집 안을 가꾸는 인테리어의 중요성을 알겠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래요, 이런 시절은 너무 이성적이거나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하고 따지는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집니다. 노을의 변화하는 색을 전문가들이 쓰는 팬톤 컬러의 번호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소음은 데시벨로 표시할 수 있어도 마음속을 파고드는 바이올린 소리는 숫자로 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를 아이 같은 어른이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어차피 어른이 되어도, 이성으로 무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을 찬찬히 넘겨보는 시간, 사진과 문장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부딪치고 발효될 것입니다. 앉아서 걸어 다니고 멀리 깊이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우울했는지 잠깐 잊어버리고 마음속의 강아지 감성을 불러내어 이만큼 사는 것도 참으로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아는가로 휘발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리드하는 것이 종이 매체의 매력입니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지만 가장 능동적인 때가 책을 읽는 시간입니다. 가장 조용한 시간이지만 가장 활발한 생각을 낳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술가처럼 강아지 감성을 불러내는 기술과 훈련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추신 : 인천에서 리빙디자인페어를 처음으로 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지인 인천은 글로벌 감각이 내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집 안의 작은 벽지 색상이라도 바꾸는 것은 감성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도시입니다.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한번 보러 오세요.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    이  영  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