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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7월, 그 해바라기밭

해바라기가 무리 지어 피는 여름날이 오면 언젠가 한밤중에 날아온 누군가의 메일이 생각난다. 길지 않은 몇 줄의 글과 사진 한 장이 전부이던 낯선 독자의 편지.  “지난달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 때문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려고 책을 읽으며 지내요. 이 사진은 떠나시기 한 주 전에 저를 데려가셨던 해바라기밭이에요. 그곳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에 노란 해바라기가 가득 핀 풍경을 바라보다 나도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 메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분은 두 번 다시 편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내 인생에도 해바라기가 등장하는 풍경이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어느 집 옥상의 두 칸짜리 방에 세 들어 살았는데, 여름날 놀다 보면 난간 위로 비죽 솟아오른 해바라기와 눈이 마주쳤다. 아래층 화단의 해바라기가 얼마나 쑥쑥 자랐는지 옥상까지 얼굴이 보일 만큼 올라온 거였다. 엄마가 시장에 가면 나는 난간에 걸터앉아 꽃대궁을 끌어당겨 꽃에 박힌 씨앗을 하나둘 뽑아 먹곤 했다. 거기서 바라보는 저녁 무렵 동네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앞집 마당 수돗가, 다른 집 옥상에 널린 빨래와 물탱크, 골목길과 화단들, 무엇보다 팔을 뻗으면 얼굴을 당겨 눈을 맞출 수 있는 키 큰 해바라기꽃. 그 풍경이 스냅사진처럼 남아 있다. 


다시 해바라기를 만난 건 부모님이 집을 지어서 이사한 몇 년 뒤였다. 가끔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던 엄마는 어느 날 소피아 로렌의 〈해바라기〉를 보고 주제가가 담긴 레코드판을 사 왔다. 턴테이블 위에서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동안 엄마는 해바라기 가득한 들판에 스카프를 두른 여배우가 쓸쓸히 서 있는 재킷 사진을 바라보더니, 아름답고 슬픈 영화라며 내게 줄거리를 들려주었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 전사한 줄 알고 있다가, 그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먼 길을 찾아간 아내. 막상 찾고 보니 남편은 기억을 잃은 채 그를 구해준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다. 아내는 드넓은 해바라기밭 옆에 지은 그들의 단란한 작은 집을 지켜보다 외로이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어린 마음에 그게 무슨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걸까 싶었지만, 엄마는 그렇게 돌아선 아내의 마음을 이해한 거겠지…. 사람들 마음속엔 저마다 다르게 만난 꽃의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얼굴 모르는 작가에게 딱 한 번 편지로 띄운 이에게, 영화 속 해바라기 사연에 눈물 글썽이던 여인에게, 옥상 난간에 앉아 커다란 꽃대궁을 마주 보며 혼자 놀던 아이에게도 그 꽃은 같고도 다른 꽃이었다. 돌아오는 계절을 알리는 작은 생명들과 사물들. 나무와 꽃, 바람의 냄새, 익숙한 그 계절의 온도가 환기시키는 추억이 있어 인생의 쓸쓸함을 잠시 잊는다. 언제나 그 기억들이 내 애틋한 행복이다.  


TV 드라마로도 방영한 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으며 이도우 작가가 스스로 ‘기억의 호더 증후군’이라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죠. 인생 첫 단골 서점, 난로에 귤을 구우며 책 읽던 겨울, “눈동자 뒤에 그녀가 살기 시작했다” 같은 연애편지 문장들…. 소설이지만,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꺼내놓은 듯 느껴지는 건 그가 ‘다 기억했다가 글에 쓰는’ 사람이어서일 겁니다. 7월, 작가가 <행복> 독자를 위해 ‘소환’한 기억은 해바라기입니다. 그의 소설과 산문처럼 이 짧은 기억이 날 선 마음을 누그러뜨립니다.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라디오 작가,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며,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잠옷을 입으렴>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산문집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를 썼습니다. 

 

글 이도우(소설가)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