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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혼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나이에, 걸었다

나는 걷는다. 산천경개山川景槪를 벗 삼아 주유周遊하고픈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은 나에게 한 달에 서너 번의 길 떠남을 재촉하는 중이다. 그렇게 내 안의 성화에 쫓기듯 떠난 길 위에서 봄날의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나무들의 푸른 생명력에 마음은 맑아지고, 가슴은 저절로 두근대기 마련이다. 나도 그들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임을 깨닫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살아가는 데 정작 많은 것이 필요한 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저 잘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에 조금은 과하게 물질의 무게를 책정해놓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오로지 두 발만을 움직여 도보 여행을 하면서도 충분히 즐거웠고, 가슴이 뛰는 경험마저도 넘치도록 많았기에 하는 말이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자기만의 눈과 귀를 열고, 두 발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지에 발을 딛고 걸어볼 일이다. 기왕이면 홀로 걸어도 좋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고요히 흐르는 바람을 깨닫고, 봄날의 이파리에 내려앉아 아롱대는 빛살에 미소 지으며, 풀꽃과 눈을 맞추는 일은 혼자 걸을 때라야 더 오롯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온전히 마음이 가라앉고 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순간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렇게 자신의 민낯과 만나고, 민낯에 드리워진 삶의 때와 얼룩에 부끄러워지고, 그래서 겸허해진다. 불현듯 만나는 자신은 때때로 먹먹한 아픔이면서, 또 한바탕 울고 난 후의 개운함처럼 마음이 맑아지는 기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있는 그대로를 보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으로 그 수고로움을 견디며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기대하지 않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멋진 풍광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할 때도 여러 번이다. 물안개 자욱한 가을날 만난 제주 쫄븐갑마장길의 따라비오름이 그랬다. 오름을 가득 메운 억새가 하염없이 나부끼고, 물안개가 치닫는 오름의 정상은 차라리 억새의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였다. 그저 어느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충만해진다더니, 안개에 갇힌 따라비오름이 주는 선물이었다. 

 

세계는 어느 한순간, 어느 풍경 하나에도 담겨 있던 것이다. 길을 걷고, 산을 오르고, 그 길과 산을 이루는 풍경 속에 가만히 잠겨도 마음은 평화롭고 행복은 저절로 찾아온다. 삶이란 육체에 머무는 여행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여행자에게 무거운 짐이야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되도록 가볍게 길을 걸으며 나와 타자他者로서 자연을 깨닫고, 서로 동무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면 이마저도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그 길이 어느 길이든 모든 길에는 나름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는 법이다.   

 

27년 차 방송 기자 박대영. 앞만 보고 달렸고, 그렇게 나이를 먹었습니다. 마흔 이후 문득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며 자신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찾는 방법은 ‘느려도 늦지 않은 삶, 걷기’였다고 합니다. 숲길, 바닷길, 산길 가리지 않으며 우리 땅 곳곳을 걸었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건넨 말은 이것이었답니다. “고맙다, 고생했다, 사랑한다.” 길 위에서 얻은 인생의 수상록을 묶어 <지름길을 두고 돌아서 걸었다>를 펴냈습니다. 하 수상한 시절, 걸어야겠습니다. 걷다 보면 그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법을 알게 되겠지요.  

 

글 박대영(SBS 기자, 여행 작가)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