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2019년 10월 고목나무에 매혹된 남자

아담한 정원이 딸린 주택을 갖는 것이 평생소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안 되는 법, 아직도 작은 아파트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뭔가 갑갑할 때, 일상화된 ‘나무 연구’라는 업業이 지겨울 때 훌쩍 자연을 찾아가고 싶어진다. 내가 즐겨 찾는 곳은 따로 있다. 고목나무 탐방이다.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천연기념물 고목나무는  2백70여 곳, 산림청 소관의 보호수 고목나무는 1만 4천여 곳이 전국에 고루 퍼져 있다. 관련 홈페이지 webbuild.knu.ac.kr(박상진의 나무세상)만 검색해도 우리나라 어디에서든 집에서 한두 시간 이내면 바로 찾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고목나무가 자리 잡은 터는 한적한 시골 마을 어귀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느긋함을 만끽할 수 있으며, 번거로움을 떨어내고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다. 품이 넉넉한 나무 아래 앉아 쫓기듯 살아가는 습성대로 시간을 셈해보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1천 년을 훌쩍 넘는 고목나무의 시간은 축지법으로 줄인 거리만큼이나 짧아지기 때문이다. 우선 자연을 압도하듯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만든 고목나무의 공간은 유년 시절의 엄마 품처럼 편안하다. 하찮은 세상사에 매달리다 번뇌의 문턱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를 넉넉하게 감싸준다. 고목나무는 어느 계절에 찾아가도 항상 품위에 알맞은 옷을 입고 손님을 맞는다. 봄날 새싹이 돋을 때는 고목나무가 오래되고 쇠잔하다는 선입견을 잊게 한다. 여름의 푸름을 거쳐 가을의 붉음과 노란 단풍의 향연은 말 그대로 날마다 색깔을 달리한다.

겨울의 나목은 삭막함 때문에 정체된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겨울날에는 잿빛 줄기만 보지 말고 큰 가지, 작은 가지, 이어진 잔가지로 훑어 올라가보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섬세하게 뻗어나간 가녀린 가지 끝부분, 차가운 겨울 하늘과 대비되어 한없이 연약해 보여도 봄의 도약을 위한 기다림이 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 고목나무를 찾아갈 시간이 없다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왕릉과 궁궐이다. 수도권에 살고 있다면 지하철이나 자동차로 대략 30~40분 이내 거리다. 우리에게 친숙한 임금님들 이야기를 나무를 통해 들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궁궐인 창덕궁에는 멀리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내내 궁궐을 지켜온 7백60년 된 고목나무도 있다. 창경궁에는 아비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을 지켜본 고목나무가 있다. 경복궁에는 세종대왕이 가장 즐겨 잡숫던 앵두 이야기가 곳곳에 서려 있고, 선정릉에 가면 5백 년 넘게 성종의 재실을 지키는 은행나무의 묻어둔 사연도 끄집어낼 수 있다. 궁궐과 왕릉의 고목나무들은 지나온 역사를 한 장면씩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고목나무는 훌쩍 예고 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감싸 안아준다. 잠시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우러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백 년 시공을 건너뛰어 전설로 읽히는 고목나무 이야기를 나이테로 셈하며 하나씩 곱씹어보는 것도 고목나무와의 만남을 한층 풍요롭게 한다.  

‘여러 해 자라 더 크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쇠잔한 고목나무에서 자연의 섭리를, 역사를, 도약을 보는 박상진 교수. 60년 동안 나무를 연구한 그는 서울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교토 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무령왕릉 관 재 등의 재질을 과학적으로 연구·분석했습니다.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받았고,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으로도 일했습니다.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궁궐의 우리 나무> 등 ‘우리 나무와 관련한 좋은 책’은 모두 그가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올 9월 <우리 나무 이름 사전>을 펴냈습니다.

글 박상진(경북대 명예교수)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