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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딸내미

결혼하기 전부터 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하느님은 우리 내외에게 아들만 둘 주셨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선 딸 욕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10여 년 전 나는 거의 동시에 내 딸뻘 되는 처자 둘을 수양딸로 들였다. 수양딸로 들였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내가 그 처자들을 키운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저 상호 동의 아래 부녀지간처럼 지내기로 한 것이다. 

 

그 딸내미들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고, 그중 한 아이는 결혼을 했다. 그런데 몸이 아주 건강하지는 못한 게 늘 걱정이다. 두 살 어린 둘째 딸내미는 아주 건강하다. 독신으로 독립해 살고 있는 둘째는 수지를 맞추느라 늘 일에 치여 산다. 글을 쓰는데, 글만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든 모양이다. 내가 경제적으로 도와줄 형편도 아니어서 그저 안쓰럽게 바라만 보고 있다. 내가 그 아이들과 남이었을 때랑 ‘부녀’가 되었을 때랑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 아이들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 정도가 달라진 점이다. 딸내미들과 가끔 만나 술을 마시곤 했다. 몸이 그리 건강하지 않은 큰아이도 술을 조금은 즐기고, 몸이 말처럼 튼튼한 작은아이는 내가 걱정스러운 말을 건넬 만큼 술을 즐긴다. 술자리는 늘 유쾌하면서도 단아했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포옹을 했다. 그것이 부녀의 의식儀式이었다. 

 

포옹이 아니더라도 딸내미들은 실제 아빠에게 했음 직한 어리광을 내게 부리곤 했다. 내가 뇌출혈을 겪고 술을 못 마시게 된 뒤로는 딸내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전화 통화나 카톡, 문자 등은 자주 한다. 큰딸내미는 제 건강을 챙기는 것 말고도 제 딸내미를 키우느라 바쁘고, 작은딸내미는 여전히 생활의 수지를 맞추느라 바쁜 모양이다. 한 5년쯤 전, 딸자식이라고 부를 만한 아이가 하나 더 생겼다. 작은아들 녀석이 결혼을 한 것이다. 며느리는 영화음악 만드는 일을 한다. 언젠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그 아이가 만든 음악을 사용한 영화를 함께 본 적도 있다. 며느리는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지금 파리의 음악학교에서 유학 중이다. 올해 말에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란다. 수양딸들은 나를 ‘아빠’라 부르고 더러 응석도 부리지만, 며느리는, 그러니까 막내딸내미는 당연히 나를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응석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 나는 한때 그게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한국의 풍속인 걸 어찌하랴. 우선 나 자신도 만나고 헤어질 때 며느리와 포옹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래도 며느리가 내게 보여주는 마음 씀씀이는 섬세하고 도탑다. 그 마음을 느끼니, 수양딸들과 며느리는 내게 똑같이 가깝게 느껴진다. 

 

두 수양딸이든 며느리든 나와의 관계가 아주 허물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작든 크든 ‘예의’나 ‘풍속’이 나와 그 아이들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며느리와는 말할 것도 없지만, 두 수양딸과도 그렇다. 그 아이들도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거리를 여유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거리, 그 여유가 외려 가족을 더 단단하게 묶는다고 생각한다. 그 여유를 ‘사적 영역’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사생활을 없애버린 인간관계 속에서는 누구라도 숨이 막힐 것이다. 열대야에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며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문득 행복하다. ‘헐거운’ 사랑이 주는 행복일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여유가 서로를 더욱 단단히 묶어주는 새로운 가족. 기자 출신 소설가이며 언어학자인 고종석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내미’ 세 명과의 애틋한 이야기를 <행복>에 보내왔습니다. 빼어난 글솜씨로 ‘당대의 문장가’로 불린 고종석은 서울대학교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석사ㆍ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한겨레 파리 주재 기자와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그는 <고종석의 문장> <플루트의 골짜기> <언어의 무지개> <문학이라는 놀이>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에세이 <감염된 언어>는 영어와 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글 고종석 | 담당 정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