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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 경험 부자

… 집에 들어서자 식구들이 모두 어디에 초대된 것처럼 차려입고 저녁 식탁에 모였다. 잘 차려진 식탁 위에는 중요한 날에만 꺼내는 여섯 개의 촛대에 촛불이 타고 있었다. “ 오늘은 네 생일이고 성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 통행금지 시간도 풀고, 보호와 간섭도 없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네 인생은 네 스스로 관리하고 살기 바란다. 그동안 너는 아주 잘 자라나 주었다. 고맙구나. 앞으로도 너는 잘되리라 믿는다, 아들아.” 엄하기만 한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갑자기 통보된 나의 성인 됨이 벅차서 마당으로 나왔다. 그날 창밖에서 바라본 집 안의 불빛이 그렇게 따스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이 글은 어느 유대인 작가의 자서전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자서전은 “그때는 모든 것이 내 것이었어”라고 말하기 위해 쓰는 것이랍니다. 꼭 맞는 말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순간이 온전히 자신에게 들어오게 된 특별한 경험과 기억의 비밀 기지가 있는 사람은 자서전을 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러 과정에 걸쳐 남다른 기억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날을 기리는 의식을 치러왔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민족이든 이런 날은 모두 어떤 형식에 맞춰 식을 치릅니다. 우리나라 제사처럼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의미조차 희미해지고 형식만 남았을 정도로 굳어진 전통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고 합니다. (제사상 말입니다. 죽은 사람 잡수시라고 숟가락을 세로로 꽂은 밥그릇과, 상 위에 가득 차린 온갖 음식과 과일의 구성이 그동안 그렇게도 이상하게 느껴졌더랬습니다. 어렵던 시절에 죽은 자를 핑계 삼아 산 자의 부족한 영양을 이날 보충했다는 ‘썰’에 한 표를 던졌죠. 그리고 식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책략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제사상이 너무나 기이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술에서 말하는 초현실주의 현장 같아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이런 제사나 차례에 쓰던 제기가 박물관에서 바라보아도 너무나 아름답고 많은 도자 작가가 이를 본뜬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부럼 깨무는 정월 대보름, 성당에서 미사 때 쓰는 미사포, 크리스마스 때 걸어둔 커다란 양말, 양쪽으로 엇갈리게 걸어둔 복조리…. 형식·의식·세리머니는 추상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과 형태와 스타일이 있었고, 대부분 특별한 색상과 문양 그리고 필요한 도구를 동반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儀式이 사라지 면 이렇게 표현되던 것이 동시에 사라지고, 그런 것을 생산하던 품목도 없어지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자산과 일자리가 유실되는 것입니다. 좀 더 보태면 사람들이 삶을 함부로 여기는 것에도 기인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게 된다는 이론도 이제 마음에 와닿습니다. 억지로 할지라도 큰절을 할 때 경망스러운 태도는 보이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저도 자라면서 놋그릇을 플라스틱과 흔쾌히 맞바꾸는 어리석음을 목격한 시대를 살았고, 그런 시간 속에 복조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모두 잊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가보신 분들, 이런 풍경 보셨나요? 정월이면 자기 집 문 앞에 짚과 접은 편지 같은 것을 장식해놓은 것 말입니다. 걷다 보면 골목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외 없이 그들만의 문장을 넣은 천을 열고 들어가는 일본 식당은 일본 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장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적 일류 국가 반열에 오른 그들이 그렇게 구식 문화로 일본다움을 지켜 심지어 샘이 납니다.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일수록 섬세한 손길의 하이 터치가 진정 더 필요하고 빛나는 구식입니다. 요즘 말로 ‘뉴 레트로’입니다. 그러려면 이제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보다 정성껏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과 경험이 모여 우리만의 풍속, 공예, 문화를 만들고 우리만의 이야기를 지니게 될 것이니까요.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잊은 것이고,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형식을 잃으면 경험을 잃고 문화를 잃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어지면 새로운 디자인으로 개선할 기회도 사라집니다. 의식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현재 진행형의 기억의 상자, 인생의 선물, 감성 지수를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와! 맨 끝의 문장이 세지요? 그런데 써놓고도 마음에 들어요.) 

 

추신 1  앞으로 시절 세시歲時를 비롯해 생일, 입학, 결혼, 장례… 이런 의식을 잘 갖추자는 캠페인을 독자들과 같이 진행하고 싶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와 현장을 공유해주세요.
추신 2  이번 호부터 <행복이 가득한 집> 제호의 타이포그래피와 디자인을 변경했습니다. 2008년 혜경궁 홍씨의 한글을 모티프로 만들어 써온 제호를 10년 남짓 만에 바꾸었습니다.
추신 3  <행복이 가득한 집>은 독자 여러분을 경험 부자로 만들어드리고 싶습니다.
           -  올해로 스물다섯 번째 열리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초대합니다. 4월 3일부터 닷새 간입니다.
           -  행복 작당作黨이라는 제목으로 남의 집 구경하기와 골목 산책은 이제 많은 분들의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배움이 즐거운 클래스, 여행 등의 행사도 여러분에게 선사합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  이 영 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