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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9월 옥수수와 딱지의 날

가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푸른 모자를 높게 쓰고 
맑은 눈을 하고 청초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더웠었지요” 하며 
먼 곳을 돌아돌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높은 구름의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조병화 

 

이 시 를 아껴두었답니다. 이번 호에 독자 여러분에게 읽어드리려고요. 읽으면서 저절로 두 손을 가슴께로 모으게 되는 건 시가 너무 좋아서인지,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 때문인지요.


여름이 잘 익어갈 이맘때,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쯤이었습니다. 제게 장보기 심부름을 보내면서 엄마는 옥수수도 사 오라는 당부를 자주하곤 하셨습니다. 강원도가 고향이어서인지, 우리 식구들은 옥수수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지금 돈으로 1천 원쯤이나 했을까요? 옥수수 장수는 아주 영리했습니다. 중간 크기 세 개를 묶거나, 아니면 큰 것 하나에 작은 것 두 개를 묶거나, 아주 큰 것 두 개를 묶어서 팔았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할지 언제나 망설인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와 저, 둘만 있던 어느 날은 유난히 잘 익고 윤기가 도는 큰 것 하나에 작은 것 두 개가 묶인 것으로 골랐습니다. 큰 것을 나 혼자 먹고, 작은 것 두 개를 엄마를 주나? 그 반대로 하나? 고민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훨씬 파격적인 결론을 냈습니다. 큰 것 한 개를 벽장에 숨기고 작은 것을 엄마와 내가 나누어 먹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옥수수는 더 먹고 싶을 만큼 아쉬웠지만, 미련 없이 나만 아는 뿌듯한 마음을 지닌 채 신나게 나가 놀았습니다. 당시에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는 제게 놀이가 아니고 경쟁의 목표였습니다. 그날 운도 좋아 어둑해질 무렵 딱지치기를 끝낼 때 동네 아이들 딱지는 모두 제 것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딱지를 모두 풀어서 잘 넘어가지 않도록 훨씬 단단한 병기로 다시 제작하는 것이 딱지치기한 날의 마감 작업이곤 했습니다. 제 것은 항상 누구나 따고 싶어 할 만큼 반듯하고 버젓했음을 저도 알고 아이들도 알았습니다. 동네 딱지를 남김없이 다 딴 그날도 다음 날을 위해 모두 풀었더니, 방 안 가득 신문지며 종잇조각들이 산처럼 쌓였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팔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쳐서 가진 것들의 진정한 실제 모습, 내가 딴 것이 딱지가 아니라 저 종잇조각들이라니….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당시에는 그 단어를 몰랐지만 허무가 확 몰려왔습니다. 새로 딱지를 만들 의욕이 꺾인 채 벽장의 옥수수가 생각났습니다. 일단 맛있는 것을 먹고 생각해보자. 벽장을 열어보니 아뿔싸! 옥수수가 그만 푹 쉬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쩜 좋아, 나도 못 먹었지만 엄마! 미안해, 미안해…. 당시에는 그 단어를 몰랐지만 허망함이 온몸의 기운을 쏙 빼갔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자기 생애가 문득 소설처럼 바라보이는 때가 있다고 말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의 인터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날은 몇십 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야구 선수들이 홈런을 칠 때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야구공의 실밥이 다 보일 정도로 커다랗게 공중에 정지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고 합니다. 꽤 번잡하게 살아온 제 인생 속에서 그날은 명징하게 정지 화면으로 되살아 보입니다. 이다음에 누가 언제 철이 들었냐고 물으면 그날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그날은 제가 한 방에 철이 든 날이기 때문입니다. 
 

- 뭐든지 때가 있다, 옥수수도 맛있을 때 바로 먹자. 
- 욕심을 버려라, 그러면 반이라도 더 먹었을 것이다. 
- 솔직해라, 더 먹고 싶다고 했으면 엄마가 더 사주었을 수 있다. 
- 속이지 마라, 그러면 두고두고 미안해할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 무조건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 속에 넝마가 들어 있을 수 있다. 
- 무조건 이기려 하지 마라, 갖고 보면 허무한 것이다. 
- 무조건 열심히 하지 마라, 무엇을 위해 하는지 끝을 생각하자. 
 

누구는 인생에서 배울 것을 유치원 때 다 배웠다고 했지만, 그보다는 늦었어도 저는 그때부터 부쩍 맏이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기억은 평생 재조직된다고 합니다. 제가 <행복이가득한집>을 발행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허무와 허망 같은 감정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옥수수와 딱지의 날ʼ 기억이 재조직된 것일 수 있습니다. 기억은 휘발성이 없는 어느 시간과 만나야 만들어집니다. 디지털 세계보다는 종이 향기 맡으며 <행복이가득한집>을 읽는 시간에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부디 허무와 허망이 없는 행복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이번 호로 창간 31주년, 감사드립니다. 


<행복이가득한집> 발행인  이 영 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