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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찬란하고 엄숙한 미소

몇 해 전 미국 버클리에 머문 적이 있다. 버클리는 샌프란시스코 바로 옆에 위치한 도시로, 바다가 아름답다.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길게 뻗은 잔교가 유명하다. 이 잔교 옆에 해산물 식당이 있다. 제법 고급 식당이라 내 돈 주고 가서 먹기는 좀 어려운 곳인데, 어느 날 초대를 받았다. 부두는 요트로 가득했고, 따뜻하고 맑은 햇살이 비쳐 그곳에 잠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적어도 그 순간의 생이 찬란한 여유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여유가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줄 알지만, 아마도 그래서 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머무는 것은 결코 찬란하지 않을 테니. 

그곳에 햇살과 여유와 바다 말고도 또 찬란한 것이 있었는데, 음식을 서빙하는 종업원의 미소였다. 키가 훤칠하고 덩치도 제법 큰 백인 청년이었다. 이 청년이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주문을 받느라 다정하게 몸을 숙이고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가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예쁜 웃음, 환한 미소를 한두 번 보았겠냐마는, 그날 내 기분이 그 종업원의 미소를 더 기분 좋게 받아들인 것 같다. 어쨌든 바다, 그 바다를 내다보는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 그리고 연어 스테이크를 곧 먹을 참이 아닌가. 나는 좀 들떠 있었고, 아무튼 그 종업원의 웃는 얼굴이 자꾸 보고 싶었다. 나는 물도 한 번 더 달라 하고, 메뉴판에 적힌 내용을 괜히 물어보기도 하고, 용건도 없는데 그저 익스큐즈 미, 그를 불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세 번쯤 그가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 그 미소 짓는 얼굴에서 경련이 이는 것을 보았다. 

나를 잠깐 동안 아무 이유도 없이 행복하게 만든, 그저 까닭도 없이 기분 좋게 만든 그 미소는 사실 그에게는 노동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행복 때문이 아니라 고객의 행복을 위해 온 얼굴의 근육을 다 써서, 그 근육의 긴장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노력하고 노력하며 지었던 웃음. 입매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덜덜 떨릴 정도로.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그는 환하게 “예스, 마담” 했다. 나는 다시는 그 종업원을 일없이 부르지 않았다. 연어 스테이크는 맛있었지만, 들뜬 기분은 가라앉은 후였다. 창밖의 바다는 찬란하게 빛나는 대신 아주 깊게 푸르렀다. 우리 모두의 삶처럼. 

사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미소를 짓는 것조차 일인데, 그것도 일이라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고, 대충만 하는 사람이 있고, 아예 소질이 없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그 어느 쪽이든 엄숙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은 똑같을 것이다. 노동에 대한, 삶에 대한,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그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엄숙한 노력. 그러니까 프로답게 웃어야지. 미소 지어야지. 엄숙한 미소. 그렇더라도 그 미소는 가식이 아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니. 분명 어느 한순간 그러했으니. 

살면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건 아니지만 예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이 많다. 그런 말은 더 많다. “안녕하세요?” 물었을 때 누가 정말로 그 사람이 안녕한지를 궁금해하며 인사할까.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러 문득 누군가가 내게 건넸던 인사를 돌이켜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인사로 인해 내 인생 전체가 위로받지는 않겠으나 나의 어느 한순간이 위로받을 수는 있다. 그 순간에는 몰랐으나 아주 한참 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문득 떠오르게 되는 위로. 나의 친구들, 나의 가족들, 나의 지인들, 나의 강아지와 나의 고양이와 나의 꽃 화분들. 그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 애써 미소를 한번 지어주면 어떠랴. 너무 오랜 노동에 지쳐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못해서라도 상대방을 한순간에 환하게 만드는 웃음을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어색한 웃음에도 찬란한 순간과 따듯한 위로는 깃들어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그러다가 다시 내게 되돌아오는. 그나저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많이 웃어봤으면 좋겠다. 소리까지 내어 하하, 하하하하, 웃어봤으면 좋겠다.  

“ 그저 까닭도 없이 기분 좋게 만든 그 미소는 사실 그에게는 노동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김인숙은 타국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청년이 지은 찬란한 미소에 매혹되었다가, 그 끝에 이는 작은 경련을 발견하고는 실망하는 대신 ‘미소 노동’의 엄숙함을 이야기합니다. 김인숙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최근 신작 소설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을 펴냈습니다. 


글 김인숙 | 담당 정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