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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내 안의 가면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그의 시 ‘깨어진 항아리’에서 그렇게 노래했다. 멕시코의 언어에 대해,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 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는 그의 시를 이해하기보다 다만 느낄 뿐이다. 그런데 왜 나는 대륙의 횃불 밑에 앉아 그를 떠올렸던가? 그때 나는 중국을 여행 중이었고, 무후사武侯祠 뒤뜰에 앉아 변검變 (이때의 ‘검’은 얼굴을 뜻한다) 공연을 보고 있었다. 쓰촨성의 비밀스러운 기예인 변검은 변화무쌍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고도 한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만, 쓰촨성 출신의 남자에게만 비밀리에 전승하던(배우 유덕화가 거액을 주고 변검을 배우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거나, 배우긴 했지만 쓰촨성의 허락이 없으면 공연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변검은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가면이 바뀌는데, 바뀌는 속도가 전광석화라 변하기 잘하는 인간의 마음과 닮았다. 

변검을 보며 옥타비오 파스를 떠올린 건 아마 그가 말한 “시는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라는 구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시만 가면인 것이 아니다. 인간 또한 죽을 때까지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존재다. 다양한 가면이 변검에 등장하듯 살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직장 떨어지고 돈 떨어져 찬밥 신세가 되어봐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저런 사정에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 친구나 변함없는 연인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을 살았으니 “좋은 시절 다 갔다”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 직장 그만둔 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던 전화가 일주일이 지나도록 단 한 통도 오지 않을 무렵 인생은 작심하고 뭔가를 가르치려 멍석을 펴기 시작한다.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은둔과 좌절의 시간이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것은 바로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극대화되니 그 순간 가장 밀도 높은 배움이 시작된다. 말로만 듣던 변검 공연을 직접 본 건 구채구九寨溝 가는 길에 머물던 청두(成都)에서였다. 쓰촨성은 사천약식藥食과 함께 증류식 술인 바이주(白酒) 등 유명한 게 많지만 채식주의자에 술을 마시지 않는 내겐 변검 공연을 하는 무후사가 우선순위였다. 무후사는 제갈공명을 모시는 도교 사당이지만,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후사 뒤뜰, 횃불 아래 앉아 변검 공연을 봤다. 밤은 깊어가고, 탁자 위에 얹어놓은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보는 공연은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날 변검과 함께 잊을 수 없던 공연은 막간에 들려주던 중국 전통 악기 얼후(二胡) 연주였는데, 해금과 마찬가지로 두 줄로 된 현악기인 얼후 소리가 주던 애절함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단 두 줄의 현으로도 그렇게 아름답고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날 나는 무후사 뒤뜰에서 처음 알았던 것이다. 변검의 신기한 기술과 함께 마치 눈물을 흘리듯 두 줄로 흐느끼는 얼후 소리에 감동받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감동 또한 가면일 때가 많으니 그날 밤의 감동이 그렇게 오래도록 내 마음을 적신 것도 어쩌면 횃불과 해바라기씨와 붉어서 터질것 같던 대륙의 석류 같은 밤 정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너무 감추려고만 하지는 말자. 살아가면서 가면이 필요한 때도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변검의 가면처럼 흥미로운 것이 되도록 나 또한 여러 개의 가면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자. 


요란한 음악과 함께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등장한 예인이 손을 대지도 않고 가면을 순식간에 바꿔 씁니다.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중국 쓰촨성의 비밀스러운 기예, 변검. 어느 날 변검 공연을 본 김재진 시인은 옥타비오 파스의 시를 떠올리며 자신 안의 가면을 생각한 모양입니다. 우리 안의 가면을 인정하고, 보다 흥미로운 것이 되도록 하자는 시인의 발상이 신선합니다. 말간 민얼굴로만 버티기엔 세상이 아무래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KBS와 불교방송 라디오 PD 출신인 시인은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와 산문집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로 상처 난 이들의 가슴에 따뜻한 위로를 보내고 있습니다. 명상과 마음 공부 전문 인터넷 방송국 유나방송 대표이기도 한 그는 최근 새로운 시집 <산다고 애쓰는 사람에게>를 펴냈습니다.

 

글 김재진 | 담당 정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