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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가왕 조용필이 뮤지컬 1인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 (정혜신 소장)

유머 감각이 뛰어난 남자가 여성들이 선호하는 파트너 1순위가 된 지는 벌써 오래다. 일반적으로 외모나 키 같은 외형적 조건보다 유머 감각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서양에서 모두 그렇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유머 감각은 사회적 능력이 뛰어나고 인간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신호로 파악되기 때문이란다.봉사 활동을 하는 단체에 가서 파트너를 고르면 좋은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은 것처럼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에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봉사 활동이나 유머는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잣대 중 중요한 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머 감각이나 봉사 활동이 인간을 규정하는 절대적 조건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요즘엔 ‘부富’라고 하는, 특정인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아예 ‘절대적 잣대’로 환치되는 경우가 곤혹스러울 정도로 많다. 로또 당첨 식의 부자가 아닌 경우, 부를 축적한 정도로 어떤 이의 대략적 모습을 추정하는 일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그들은 성실성이나 추진력, 끈기, 치밀함, 절약 정신, 예측력 등이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도 ‘부를 축적한 사람’을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종합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단정하는 인식은 촌스럽고 유아적이다.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제력이 앞선 사람의 발언권은 형제간 서열에 관계없이 강력한 경우가 많다. 돈과 관련한 문제에서만 발언권이 센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 교육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눌 때도 경제력이 약한 사람은 경제력 좋은 동서의 견해에 비해 열등한 취급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돈 잘 버는 사람의 판단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판단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성공이 다른 분야의 성공을 보증하는 수단이 된다. 미분화된 사고 패턴의 극명한 사례다.

우리나라 100m 최고 기록 보유자가 전성기 때 프로 야구단에 전문 대주자로 영입된 적이 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단거리를 우리나라에서 제일 빨리 달릴 수 있는 최고의 스프린터가 도루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야구 전문가의 지적처럼 도루는 빠르기와 함께 센스와 결단성 등을 고루 갖춰야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다. 바람처럼 빠른 발을 가졌다고 도루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일종의 착각이다. 가왕歌王이라고까지 불리는 조용필이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해도 뮤지컬에서도 일인자가 될 수는 없다. 뮤지컬의 기본이 가창력일지라도 그렇다. 천부적인 운동감각으로 프로 야구에도 도전했던 불세출의 농구 천재 마이클 조던이 야구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의 성공이 다른 모든 분야의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이 당연한 명제가 ‘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남들에 비해 월등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100m도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고, 노래도 가장 잘 부를 수 있고, 덩크슛도 호쾌하게 꽂아 넣을 수 있으며 홈런도 마음먹은 대로 펑펑 날릴 수 있다고 믿는 격이다. 본인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의 인식 또한 그렇다. 일종의 심리적 착시 현상이다. 부를 축적한 사람을 폄하할 필요도 없지만 무턱대고 이상화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피아노를 잘 치거나 남을 잘 배려하는 것처럼 빛나는 하나의 재능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홈 스쿨링 운동가는 수십 년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천부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이들만 살아남는다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통찰력, 지혜, 정의감, 너그러움, 용기, 창의성처럼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학교에서 우수하다고 판단받지 못한, 전혀 엉뚱한 아이들에게서 수시로 나타나 혼란을 느꼈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기준 하나로 그 사람이 모든 면에서 우수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게 어리석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그 같은 논리는 부를 축적한 사람에 대한 인식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착각 상태의 시대적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을 잘 쓰는 정신과 전문의’ (주)정혜신 심리분석연구소 정혜신 소장님의 이야기와 함께 11월을 시작합니다.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사람이 다른 분야로 옮긴 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야로 옮긴 뒤 더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그맨 강호동 씨의 경우 방송인이 된 뒤 천하장사였을 때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주목을 받는 경우에 속할 것입니다. 분야를 옮긴 뒤 사라지는 별과 더 밝게 빛나는 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전 경험의 노하우와 기법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닐는지요. 새 술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새롭게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