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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감성의 작은 불씨 (황두진 소장)

에피소드 1 아는 사람이 모는 차를 타고 어딘가 가던 중이었다. 자세히 보니 차의 계기판에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용기가 하나 보였다. 나중에 붙인 것은 아니고 원래 그 차의 디자인이 그랬던 것 같았다. 무엇인가 물으니 차 주인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꽃병이라고 했다. ‘자동차 계기판에 꽃병이라?’ 잠시 의아했지만 순간 수많은 상상이 마치 봄날의 꽃처럼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그래, 만약 내가 이런 차를 갖고 있다면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화분의 꽃 한 송이를 꺾어서 하루 종일 차 안에 두고 다닐 수도 있겠구나. 마치 어린 왕자가 자기 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다가 왠지 힘들고 피곤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아무 말 없이 그 꽃 한 송이를 줘도 좋겠다. 꽃을 받아서 기분 나쁠 사람은 없겠지. 만약 그 꽃에 향기가 있다면 방향제도 필요 없겠네. 그 꽃에 나비도 날아들려나….

에피소드 2 전자제품 디자이너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가끔 외국의 전자제품을 연구 차원에서 분해하곤 하는데, 전자회로 부품에 엉뚱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 부품에 스마일 그림이 그려져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처음에는 그것이 그 제품의 성능과 직결된 일종의 비밀 코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 나중에 내린 결론은 아주 단순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그냥 일종의 조크로, 나중에 그 제품을 분해하는 사람을 한번 웃겨주고 싶어서 그려 넣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것을 발견할 때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자기에게 재미난 방법으로 말을 거는 것 같아서 즐겁다고 했다. 색다른 방식의 대화인 셈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내 주변의 예를 통해 인간의 감성이 반짝하고 빛을 내는 경우를 든 것이다. 그 작은 빛은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또 다른 작은 빛이 반짝거리게 한다. 참으로 별것 아닌 듯하고, 심지어 어떤 측면에서는 ‘쓸데없는 짓’일 수 있지만 이런 작은 것들이 사람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은 또 얼마나 크고, 또 오래갈 것인가. 나는 그 이름 모를 자동차 디자이너와 제품 디자이너에게 무한한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한편으로는 치열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기 위한 무장을 더욱 강력하게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 자신의 감성이 메마르고 거칠어지는 것을 막는 일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겉으로 성장하고 속으로 말라 들어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지 않으려면 책과 영화, 음악을 더욱 가까이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나를 둘러싼 자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기쁨과 슬픔에 항상 촉촉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알랭 드 보통이 <행복의 건축>에서 말한 것처럼 확실히 사람들은 조금 슬플 때 주변 세상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갖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기쁨을 알기 어렵다. 내 고등학교 친구 하나는 훗날 우리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나에게 전화를 걸어 ‘괴로움은 참을 수 있지만 즐거움이 없는 것은 참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난 그때 뭔가 알 수 없는 묵직한 것에 내 삶이 깔려 있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의 이 말은 나에게 그 무거움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나에겐 알랭 드 보통이나 내 친구가 모두 비범한 감성의 소유자들인 것 같다. 이런 식의 대화를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좋은 삶을 살고 있노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우리의 감성 교육에는 졸업이나 수료가 없다. 그것은 평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다. 감성의 작은 불씨,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또 나누며 사는 사람이고 싶다.

건축가 황두진 님(황두진 건축사 사무소 소장)의 이야기와 함께 10월을 시작합니다.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건축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경복궁 옆 열린책들 사옥(현 시네마서비스 사옥), 홍대 근처의 해냄출판사 사옥, 북촌의 가회헌 레스토랑 등을 설계했고 현재 종로의 유서 깊은 춘원당 한의원의 신관 및 박물관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축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공공 디자인과 한옥 작업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해냄), <한옥이 돌아왔다>(공간), <한옥에 살어리랏다>(공저, 돌베개)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