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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포옹과 사랑을 빼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이라는 걸 해왔다. 지금까지 20년 넘게 일한 셈이다. 그동안 딱히 맘 편히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서도 여행 작가로서 일이 우선이라 메모리 카드 가득 사진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알게 모르게 지쳐갔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재충전을 해야지. 그러다 보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올해는 좀 설렁설렁 지내보기로 했다. 그동안 미뤄둔 개인 작업을 해보자는 핑계도 댔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자질구레한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프리랜서라고 마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건 아니다. 정리해야 할 서류도 있고 우체국에도 가야 하고 은행 일도 봐야 한다. 세금계산서도 제때 처리해야 한다. 총무부와 영업부, 시설부가 해야 할 일을 혼자 모두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아이패드를 뒤적이는 모습만 상상해서는 곤란하다. 어쨌든 프리랜서도 어엿한 직업인인 것이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덤빌 필요가 없으니까 그럭저럭 즐겁게 하고 있다. 아, 이런 게 생활이구나 하고 실감하면서 말이다. 관공서에 들락거리고 마트에도 가고 서툴지만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어이, 오늘도 수고했어’ 하며 서 있다. 그럴 때면 손을 탁탁 털고는 베란다 앞으로 가서 붉은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 감각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유를 딱히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일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약간은 노곤한 몸으로 노을 앞에 서면 오늘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만족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차오른다. 

사실 이렇게 마음먹은 계기는 지지난해 간 갈라파고스 여행 때문이다. 내가 갈라파고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에서는 강도 7.8의 지진이 발생했다. 바다에는 지진해일 경보가 내렸고 우리가 탄 배는 지진의 진원지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밤새 수평선을 향해 달려야 했다. 배는 미친 듯이 흔들리며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했다. 창밖에는 거센 파도만이 넘실거렸다. 어느 순간, 선실 레스토랑에 모여 있던 여행객 중 한 명이 울기 시작했는데, 배는 곧 울음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선실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지나온 내 생을 떠올렸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말고는 달리 없었다. 흔들리는 선실에 앉아 나는 내가 더 큰 아파트에서 살지 못한 것을, 더 비싼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것을, 더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새벽 일찍 떠나오느라 일곱 살 난 딸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것이, 아내의 볼에 키스하지 못한 것이 오직 후회될 뿐이었다. 만약 그 순간 신이 나타나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 가족을 안아보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다행히 지진해일은 오지 않았고, 아침 6시 나는 수평선 너머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했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조금 더 놀기로, 조금 더 인생을 낭비하기로 했다. 어렵게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보다는 웬만하면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그 여행 이후 나는 틈날 때마다 아이를 안아주고 아내의 손을 더 자주 잡는다.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한다. 포옹과 사랑을 빼고 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했다.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았고, 벚나무 환한 그늘에 앉아 차가운 생수를 마시며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이란 게 꼭 대단한 이념이나 지고지순한 사랑, 엄청난 부와 명예 같은 걸 이루어야 제대로 산 게 아니라는 의미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맛있는 와인과 파스타를 먹으며, 틈틈이 여행이나 다니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 그것도 옳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행복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행복의 비결을 큰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는 작은 기쁨을 자주 느끼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우리 주변은 행복의 씨앗으로 가득합니다. 먹고 자고 사랑하는 일상이 모두 소소한 기쁨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일상 속 기쁨을 맛볼 여유를 잊곤 합니다. 여행 작가 최갑수는 갈라파고스 섬으로 가는 험난한 뱃길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조금 더 쉬엄쉬엄 인생을 낭비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낭비’라는 단어가 이리 진취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그것이 행복을 위한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여행작가 최갑수는 “여행이란 뭐죠?”라고 묻는 사람에게 “위로 아닐까요”라고 대답합니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등의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