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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이야기의 씨앗들

“소설 소재를 어디에서 찾느냐?” “소설을 어떻게 쓰기 시작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다양한 소재로 잽싸게 책을 내다 보니, 또 시류에 맞는 소재를 발굴한다는 인상을 주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이 지면을 빌려 답을 하자면, 어떤 이야깃거리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커다란 덩어리로 들어앉아 있었다. 데뷔작인 <표백>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는 시대인 것 같다’며 자살을 결심하는 젊음에 대한 소설인데, 이것도 그런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지금 다시 읽으면 손질하고 싶은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그래서 다시 읽지 않는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너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였기에 미숙한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원고지 1천 매 분량을 끝까지 써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표백>의 주제에 나는 오래도록 사로잡혀 있었다. 그 소설을 쓰고 난 뒤로도 한동안 그랬다. 

실은 그 전에 쓴 습작이 있었다. 신문사가 배경인 소설이었는데, 다 쓰고 보니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는 졸작이어서 아내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그런 아내에게도 엄청나게 잔인한 혹평을 받았다). 첫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한국 언론과 기자들의 이야기를 꼭 쓰고 싶다. 북한 이야기,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반드시 소설로 풀어내고야 만다고 다짐하는 주제다. 그런데 늘 이렇게 거대한 주제와 소재로만 소설을 시작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풀꽃 씨앗처럼 바람에 떠다니다가 내 머리 위에 떨어지고, 거기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 어느 순간 물 몇 방울을 맞고 갑자기 싹을 틔우는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그렇다. 어느 날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놀다 왔는데, 그 자리에서 A라는 친구에게 B가 “네가 옛날에 C를 왕따시켰던 거 기억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A는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면서 정말 놀라더란다. 나는 그 에피소드를 무척 인상적으로 들었고, 그 앞뒤로 사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살을 붙이다가 <그믐…>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도 내 두피에 이야기의 씨앗이 최소한 두 알은 앉아 있다. 얼마 전 공연을 보러 혼자 광나루역 근처에 갔다. 낯선 동네고 방향감각이 썩 좋지도 않아서 공연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다가 지하철역을 못 찾아 밤에 길을 한참 헤맸다. 평범한 동네 술집, 밥집이 늘어선 골목을 걷는데,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남자가 길에 서서 통화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통화 내용도 듣게 됐다. “그래, 수경아, 아빠가 월요일에 꼭 데리러 갈게. 그때까지 잘 지내야 돼. 좋은 꿈 꾸고.” 손가락으로 살짝 찌르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과 목소리였다. ‘꼭’이라는 말을 할 때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실하던지. 무슨 사연일까? 어떻게 해서 저렇게 어린 나이에 딸을 갖게 되었고, 왜 그 딸과 떨어져 주말을 보내야 하고, 어쩌다 밤늦게 술을 마시다가 밖으로 뛰쳐나와 저토록 간절한 전화 통화를 하게 된 걸까? 어린 딸 옆에는 지금 누가 있는 걸까? 

며칠 전에는 한 출판사와 작은 프로젝트를 마치면서 담당 편집자에게 업무 메일을 보냈다. 그이가 성심성의껏 일을 해줬고 그 솜씨도 무척 뛰어나서, 그런 점에 대해 감탄했다고 썼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일견 무뚝뚝하게 보이던 상대가 감사하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자신이 블로그에 비공개로 만든 ‘칭찬 폴더’에 내 메일을 붙여 넣었다고. 프로페셔널한 모습만 보이던 중견 편집자가 실은 인터넷에 비밀 공간을 마련해, 자기가 칭찬받은 일들을 따로 정리해놓았다는 사실에 은근히 웃음이 났다. 내가 보낸 메일 내용으로 보나 그이의 경력을 보나, 그게 이직용 포트폴리오 따위는 아닐 것이었다. 아마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 들여다보고 용기를 얻는 용도 아닐까? 그 폴더를 볼 때 그이는 어떤 표정일까? 안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겼을까? 이 두 개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싹을 틔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 머리에서 는 끝내 적당한 기회를 못 얻어 말라버리거나, 아니면 다시 바람에 실려 날아가 다른 이에게 전해질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짧은 글이 그런 한 줄기 바람이 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한 해를 차분히 마감하고, 다음 해를 의욕적으로 준비해야 할 연말이지만, 어느 때보다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변화하는 시대,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를 발 빠르게 발굴해 명쾌한 문장으로 유쾌하게 풀어내는 소설가 장강명 씨는 아직 소설로 발전시키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의 씨앗 두 가지를 보내왔습니다. 어린 딸에게 전화하는 젊은 아빠와 자신의 블로그에 ‘칭찬’ 폴더를 만들어 관리하는 편집자의 이야기는 작가의 표현처럼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씨앗일 뿐이지만 정서적 환기 효과가 제법 강렬합니다. 장강명 작가는 SF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와 흡인력 있는 이야기 전개,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는 2011년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고, 2016년 <댓글부대>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 최근 신작 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