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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부산이 내게 준 것

새벽에 부산역에서 바라보는 영도는 푸른빛이 감도는 연어색이다. 부산역에서 영도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광장 쪽 정면 출입구가 아니라 후면 부두 쪽 2층 출입구다. 내가 서울행 새벽 기차를 타는 날이 한 달에 두어 번. 숨 가쁜 일정을 치르고 자정 무렵 부산역에 도착해 같은 자리에 서서 영도를 건너다본다. 섬은 거대한 별 무리로 반짝인다. 환상적이다. 환상은 실체를 잘 알지 못할 때 품는 욕망의 현상이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연어빛과 밤의 별 무리는 항도港都의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영도다리 건너 도시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창마다 어려 있는 신산한 삶의 곡절들은 무지와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일산과 홍대 앞, 경주와 파리를 오가던 삶을 해운대, 낙동강 하구 쪽으로 옮겼지만 나는 이곳에 뿌리내리지 않았다. 뼛속까지 떠돌이 이방인이라 자처하며 이곳에서는 저곳을, 저곳에서는 이곳을 그리워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아니 수시로 이곳에서 이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마치 저곳에서 짧게라도 진하게 삶을 살 듯이 이곳에서 뜻밖의 은밀한 여행을 도모하는 것이다. 나의 해운대 생활에서첫 번째 여행 코스는 장산 오르기다. 두 번째 코스는 이기대 오륙도 갈맷길, 세 번째 코스는 도심 국제시장 어름과 보수동 책방 골목, 그리고 네 번째 코스가 천마산과 그 너머 다대포 몰운대까지. 해운대 장산의 묘미는 폭포사를 지나면서 뒤돌아보는 데 있다. 한 고비 만날 때마다 멈춰 서서 뒤돌아보면, 마치 두 팔을 활짝 벌린 것처럼 해운대와 이기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 길에 탁 트인 바다 풍경과 대마도를 품은 수평선을 넉넉히 바라볼 수 있다. 해운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장산이라면, 광안리는 황령산에서, 낙동강 하구와 어우러지는 다대포 바다는 아미산에서 감상할 수 있다. 장산과 해운대에서 생기로운 아침 해를 맞이한다면, 아미산과 몰운대에서는 고즈넉한 노을빛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장산, 황령산, 천마산, 아미산뿐이 아니다. 부산의 산으로 치면, 범어사가 자리잡은 금정산이 으뜸이다. 이렇듯 부산은 한반도 이남의 최대 항구지만, 세계 유수의 항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산을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도로가 가파르고 좁고, 계단과 터널, 고가도로와 다리가 많고, 심지어 바다를 가로질러 길이 7km가 넘는 대교가 놓여 있을 정도다. 여기에 동란기 수도이자 피란민의 집결지였던 탓에 언덕이든 산이든 누군가의 묏자리까지 등을 대고 누일 만하면 삶을 부려놓았던 애틋한 역사를 품고 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주름이 촘촘하게 접혀 있고, 그만큼 이면이 많은 항도가 부산이다. 삶의 진실은 보이는 표면에 있지 않고, 이러한 주름과 주름 사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부산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체험하고자 떠나온 여행자라면, 하루 한낮 또는 하룻밤 스쳐 지나가는 관광지에 그치지 않고 짧게나마 깊게 살다 갈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부산을 잘 몰랐다. 그저 직장을 따라온 것, 이방인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손을 믿는 사람, 마음의 문장을 쓰는 것도 손이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손이다. 이 두 손으로 사막에서도 김치를 담그고,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그 식탁에 앉아 세상을 읽고, 소설을 썼다. 그러니 나는 어디에서도 살 수 있었고, 부산도 그 어디 중 한 곳이었다. 다행히 부산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이 많았고, 산자락마다 숲과 오솔길들이 바닷가까지 번져 있었다. 바다가 드넓은 만큼 강과 만, 무엇보다 포구가 많았다. 포구마다 다채롭고 진기한 해산물이 넘쳐났다. 포구들을 들고 나며 바닷장어의 진미를 발견했고, 회 맛을 터득했다. 그리고 영화. 수영만 요트 경기장의 옛 시네마테크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밤의 불꽃열기와 미지의 언어로 펼쳐지는 낯선 영화들을 사랑했다. 이제는 수영강 변으로 이전한 영화의 전당을 향해 수영강변로를 달리고, 바다색이 남아 있는 이른 저녁 시간, 멀리에서 찾아온 문우들과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미포 어시장
으로 달려간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쓴 문장들, 그리고 앞으로 쓸 소설들로 향한다. 부산이 내게 준 것, 부산에 대하여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러므로 매번 새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부산 여행자들의 마음속에 새겨질 사람, 그 사람이 사는 공간. 부산을 떠날 때에는 저마다 자기만의 소설 한 편씩 품어 가기를!



부산에 산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바닷가가 아니라면 어디에 가든 언덕을 넘고 산을 올라야 하더군요. 드넓은 바다와 수많은 산이 이렇게 극적으로 조우하는 대도시가 또 있을까, 새삼 감탄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부산에서 생활해온 소설가 함정임 씨가 단아한 문장으로 한국 최고, 최대의 항구도시 부산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살폈습니다.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로 등단한 소설가 함정임 씨는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소설 창작과 연구를 병행합니다. 최근 작으로 소설집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식도락 기행기 <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에세이집 <파티의 기술> 등이 있습니다. 언제나 어딘가로 떠날 채비를 하는 그는 삶의 터전인 부산에서도 늘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