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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웃음을 찾아서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열 가지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의 귀에 착 달라붙는 중독적인 소리’로 달리 표현할 수 있는 그 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효과적인 광고를 만들기 위해 연구한 것이다.

예컨대 치이익, 하고 잘 달아오른 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구워지는 소리에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얼음으로 가득한 유리잔에 탄산음료를 따를 때 나는 소리 역시 사람들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탄산음료의 뚜껑을 딸 때 나는 ‘펑’ 하는 소리 또한 소비적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소리가 되었다. 전화벨 소리, 초인종 소리,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 등이 왔을 때 휴대폰 진동음도 강력한 중독성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은 영예의, 부동의 1위는 아기의 웃음 소리였다. 다른 소리와 달리 전혀 가공하지 않은 소리이면서 지극히 순수하고 인간적이며 아름다운 소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웃음소리를 낸 적이 있을 터인데, 비록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웃음소리를 낼 때의 행복감은 존재 자체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유년기를 지나 나이가 들수록 웃을 일이 줄어든다.

어린 시절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얼마나 많이 웃었던가? 아이들이 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며 까르르 웃는 소리는 활기찬 생명력의 징표였다. 사춘기 여학생들은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깔깔 웃음으로써 또래 남학생들의 가슴을 물레방아처럼 쿵덕거리게 만들었다. 술자리에서 선배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여성들의 맑고 높은 음색의 웃음, 박장대소와 가가대소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고 흥미로운 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낳고 마음 깊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느낀 것도 아기의 웃음 때문이었다. 웃음은 행복감을 표현하고 행복을 매개하는 도구이자 인간다움의 자연스러운 발로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게 되고, 사람들의 어두운 이면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보고 들으며 웃음 자리를 냉소와 비웃음이 대신하게 되었다. 남보다 훌륭한 지위에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실수와 단세포적인 면모가 끊임없이 드러나고 폭로되면서 냉소나 비웃음은 다시 분노와 허탈감으로 대체되었다. 세상은 광속으로 바삐 돌아가는데, 초원을 달리고 동굴에서 생활하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를 지닌 채 도태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다 신음이 절로 나오는 판이다. 그걸 또 잘 감춰야 우습게 보이지 않을 터이니 로봇 같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럴 때 언제나 허허, 혹은 실실 잘 웃는 사람을 보면 속도 없는 사람이거나 직업이 남을 웃기는 일인가 보다 싶었다.

대학 시절 내 스승은 무척이나 잘 웃는 분이셨다. 작은 웃음의 기미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화제로 이야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까지 웃음의 향연에 초대해 같이 웃음을 나누었다. 스승의 그림자를 벗어나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유난히 크게 소리 높여 웃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을 사회 선배들의 지적을 받으면서 알았다. 그런 지적을 받을 때마다 사회화가 덜 된, ‘덜 떨어진’ 인간으로 보일까 불안했던지, 내 웃음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웃는 순간도 줄어들었다.

연초에 스승의 댁에 세배를 하러 갔을 때 역시 세배하러 온 스승의 제자 10여 명과 자리를 함께했다. 잠시 자리를 떠서 다른 방에 들어가자 거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남녀와 나이를 불문하고 놀랍게도 서로 닮아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사람은 저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울 뉴런에 의해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존재이고, 모방의 대상이 훌륭하거나 위대하거나 잘 웃는 사람일 때 스스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그 뒤로 나는 잘 웃는 사람, 웃음이 폭발하는 곳을 밥 사 먹어가며 쫓아다녔다. 웃음이 행복의 표상이자 원천일진대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남은 인생이 짧다. 비록 1백20세 인생이라 해도. 


문득 떠올려봤습니다. ‘내 주위 누가 맑고 크게 웃었더라….’ 친구와 동료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별일 없이도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소설가 성석제가 요즘 웃음을 찾아다닌답니다. 무방비 상태로 빠져들어 읽다 문득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특유의 입담과 해학을 지닌 그에게 무슨 웃음이 더 필요할까 싶지만, 찬찬히 글을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가 성석제는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중·단편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등을 펴냈고, 장편소설로 <왕을 찾아서> <아름다운 날들> <투명인간>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