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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시인의 하루


종종 하루의 일상에 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시인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한 이유에서 물어오
는 것이다. 하루를 보내는 데 특별할 게 별로 없는 나로선 그러한 질문을 도대체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대답을 해주어야만 하는 자리에선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매일 시를 쓰거나 그러진 않아요. 그런 짓은 나뿐 아니라 상대방을 곤란에 빠뜨릴 수 있거든요. 그리고 매일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해야 하는 의무도 별로 없이 지냅니다. 일이 있으면 조금씩 하고, 일이 없으면 혼자서 여기저기 쌓인 나무 먼지를 닦으며 지냅니다.”

말을 해놓고 보니 그럭저럭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참고로 “나무 먼지 닦으며 지낸다”는 말은 오래된 원고를 퇴고한다는 내 쪽의 너스레 같은 것이다. 귀퉁이를 사랑했던 것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작업 중 하나인데, 오래전 수첩에 심은 단장들을 일으켜 세운다는 느낌에서 고고학자들의 채굴 작업처럼 수분이 다 마른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부서질까 조심스럽고 아련할 때가 있다. 어떤 날의 하루가 그런 것들을 복원하는 데 바쳐진다면 기록이 더 할 나위 없이 충만한 날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아름답지만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내 하루가 시적인 영감과 문학적 긴장으로 꽉 차 있지는 않다. 바꾸어 말하면 시시하다고 할 만큼 비문학적으로 보일 일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시인의 하루가 어떤 비밀로 꽉 차 있을지 궁금한 독자에겐 실로 미안한 말이지만, 주머니 속에서 카나리아 한 마리가 푸드
덕푸드덕 날아오르게 하는 마법 따위는 내겐 없다.

눈을 뜨면 아이들의 발등과 발가락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가 일어나면 밥을 먹이고 함께 이를 닦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준다. 작업실에 오면 커피를 끓이고, 책을 보다가 밀린 잡무를 한다. 정수기 통을 바꾸고 복사기 토너를 갈고, 닳아진커피 가루를 사러 나가고, 공과금 영수증을 확인하고, 건물주에게 전화를 걸어 변기통의 수압이 너무 낮아 똥이 넘칠 것 같다고 불만을 이야기하고, 대학원을 마치고 작은 출판사를 시작한 후배가 보내온 책을 떠들어보고 중얼거린다. “음, 실용서는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책 같아. 가령 <집에서 펭귄 기르는 법> 같은 책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고.

그런데 그런 책은 왜 없을까?” 그러다가 초인종이 울려 나가서 새로 이사 온 윗집에서 가져온 시루떡을 받고, 인사를 하고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는다. 내 명함엔 ‘라이팅 레슨 스튜디오 펭귄라임 대표 김경주’ 라고 적혀 있다. 시루떡 귀퉁이를 조금 뜯어 먹으며 곧 나올 신간의 교정지를 살펴본다. “이번 책도 난 망할 거야.” 들어주는 이는 없다. 혼자서 무언가를 조금씩 하면서 중얼거리다 보면 하루가 저물 때도 있다. 어떤 종류의 중얼거림이 그에게 존재하는가는 작가에게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 작가는 자신의 중얼거림을 모아 고백을 정제하는 사람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신의 집에서 펭귄을 기르는 사람 이야기를 발견한다. 온도 조절이 관건이라 펭귄을 키우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든다고 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집에서 펭귄 기르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의 가능성은 좀 더 무궁무진해 보인다.

우선적으로 알아둘 건 펭귄 한 마리가 약 5천만 원이라는 것. 저녁이 되면 연필을 깎는다. 매일 조금씩 깎는다. 무언가를 조금 적어 내려가다가 갑자기 책상 서랍을 꺼내 털어서 압정이 없나 찾아보고, 압정을 찾으면 안심하고 책상 서랍을 밀어 넣는 일을 반복 한다. 이처럼 남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어떤 종류의 신경질 같은 것이 문장 속에 생겨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 들러 닳아진 아내의 칫솔모를 고른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발가락을 가만히 만져보고 잠들 것이다.

독일 소설가 페터 한트케의 책 <어느 작가의 오후>를 아시나요? 1987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12월의 어느 오후,‘작가’가 바라본 외부 세계를 그립니다. 첫눈이 내릴 뿐 특별한 사건이라곤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 말이죠. 김경주 시인의 하루도 어쩌면 우리의 어떤 날과 꼭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경주 시인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희곡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습니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고래와 수증기>가 있고, 산문집으로 <패스포트> <밀어> <펄프극장> <자고 있어, 곁이니까>가 있습니다. 현재 홍대 스튜디오에서 글쓰기 교실 ‘펭귄라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