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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늙는 게 아니라 익는 겁니다

그분에게서 연하장이 왔다.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서다. 종이 연하장에 비해 좀 성의가 없다고? 아니다. 딱 보면 안다. 지워야 할지 남겨야 할지.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액정 화면 위로 그의 마음도 뜬다. “이건 진심이로군.” 대량 복제로는 진심을 전달하기 어렵다. 손가락이 가슴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응답하지?”

그분의 직업은 가수다. 이름은 전승희, 성별은 남자.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없다. 오로지 노래로 맺어진 사이다. 그런데 어떻게 ‘진심’ 운운하는가? 스토리는 이렇다. 방송사를 떠나 대학으로 간 후에도 후배 PD들과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노래방 마무리에서 가요 한 곡을 불렀는데 그게 바로 그분의 노래 ‘한방의 부르스’였다.

“형도 이런 노래 아세요?” 대학가요제를 6년이나 연출한 내가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가사가 예술이야(여기서 예술은 인생과 대비된 개념이다. 즉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할 때의 그 예술이다. 기억 속에 살아남아야 예술이 된다).” 후배 중 한 명이 가요 프로그램에 그 가수를 섭외했다. 내가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연까지 전한 모양이다. 가수는 내게 감사의 전화를 했고 지금까지 애창곡 목록에서 그의 노래는 굳건히 살아남았다.

리듬은 경쾌하지만 가사는 다소 궁상맞게 시작한다. “옛날의 나를 말한다면 나도 한때는 잘나갔다.” 누가 이런 말을 한다면 주변 반응이 어떨까? ‘취했나?’ 십중팔구는 이럴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미 예상했다는 듯 노래엔 ‘계몽적’인 답변도 들어 있다. “한때의 나를 장담 마라.” 아,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경고인가.

<응답하라 1988>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저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한마디씩 한다. 나도 ‘한때’를 떠올려보았다. 내가 연출한 <퀴즈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할 때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고 프로그램에 출연한 대학생 일부는 스타로 대접받았다. 나 역시 ‘스타 PD’라는 과분한 애칭을 얻었다(지금 이런 글을 쓰는 호사를 누리는 것도 그 연장선 아닐까).

들떠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출한 신원호 PD의 나이를 보니 정확히 나보다 20년 아래다. 요즘 잘나가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 <삼시세끼>의 나영석 PD도 다 그 또래다. 그들에게 ‘한때의 나를 장담 마라’고 조언해줄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 한때를 맘껏 즐기고 그 즐거움을 많이 나누라고 말하고 싶다(단, 오래 가지려고 애쓰지는 마라.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1988년에도 유재석 같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유재석, 신동엽, 김구라를 합친 정도의 슈퍼 진행자가 있었다. 그가 주병진이다. 당시에 <일밤>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개그계의 신사였고 사업계의 신동이었다. 한때 최고였던 그가 한동안 조용하더니 어느 날부터 다시 TV에 얼굴이 보인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 제목은 <개밥 주는 남자>다. 이제 그는 불쌍한 사람이 된 걸까? 아니다. 라디오 진행자인 그는 거대한 평수의 펜트하우스에서 개 세 마리와 놀고 있다. 이걸 찡하다고 해야 하나, 짠하다고 해야 하나?

인생이 어떻다고 말해주는 그 어떤 책보다 주병진의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온다. 강자였던 그는 어느새 현자가 되었다. ‘나 이렇게 산다’가 아니라 ‘이런 게 인생이다’라는 걸 그는 리얼하게 보여준다.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일밤>에서 그의 유쾌한 파트너였던 가수 노사연이 여전히 입담을 과시 중이다. 히트곡 ‘만남’ 이후 잠잠하더니 ‘바램’이라는 노래로 동년배들 노래 세상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노래의 시작은 이렇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결국 손에서 놓아야 할 것들을 깨달은 후 도달하는 끝부분은 이미 예술의 경지다. 한때 잘나갔던 친구들을 만나면 합창하고 싶어진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화양연화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은 인생의 사계절을 모두 통과한 이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니까요. 수많은 강의와 글을 통해 ‘행복한 인생’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전파해온 주철환 교수는 동북중ㆍ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MBC에서 PD로 일하며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과 소통했습니다. 그 후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OBS경인방송 사장과 JTBC 대PD를 거쳐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저서로는 <청춘>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오블라디 오블라다><인연이 모여 인생이 된다>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