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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그럴 필요 없는데

“사람들은 급행열차에 올라타지만 자기가 무엇을 찾으러 떠나는지 몰라. 그래서 법석을 떨며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거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가을 학기 수업 중에 ‘삶과 꿈’이라는 과목이 있다. 정확한 이름은 ‘문, 삶과 꿈’이다. ‘문’이라는 글자가 붙은 건 문, 사, 철, 즉 문학, 사학, 철학 중 문학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교재는 세 권인데 교수가 재량으로 고를 수 있다. 나는 엄청나게 두꺼운 책(상하 두 권이고 저울에 올려보니 무려 1.8kg)과 매우 가벼운 책 하나(이 또한 저울로 재보니 0.2kg), 그리고 영화가 더 유명한 책 한 권을 골랐다. 제목은 순서대로 <돈키호테> <어린 왕자> 그리고 <죽은 시인의 사회>다.

내가 보기에 돈키호테가 행복한 건 착각 덕분이고 어린 왕자가 불행한 건 환상 때문이다. 착각이나 환상이 아닌 이상을 현실로 옮기려던 키팅 선생, 그는 결국 학교에서 추방당한다. 노랫말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 세 사람 모두 살고 있다. 가끔은 돈키호테, 때로는 어린 왕자였다가, 마침내 키팅 선생이 된다. 다중 인격은 아니고 대략 다중방송 정도다.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고 때마다 필요한 채널로 갈아타는 형국이다. 그렇게 지냈더니 직장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참이다. “궁금하면 너도 그렇게 한번 살아봐.”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이다. “좋은 책 좀 추천해주세요.” 이런 질문은 이제 인터뷰나 면담이 끝나간다는 신호다. 단번에 답을 준 경우는 없다. 우선 진짜 궁금해서 묻는지 의심이 간다. 내가 추천한다고 해서 과연 그 책을 사서 읽을까? 도서관에 가서 빌릴까? 혹시 나의 취향으로 나의 성향까지 파악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사실 질문받을 때마다 똑같은 책을 추천하는 것도 어색하다. 그래서 이렇게 답한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책이 있죠. 일단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가세요. 눈길을 끄는 책 앞에서 걸음을 멈추세요. 잠깐 서서 펼쳐본 후 마음을 끌어당긴다면 지갑을 여세요. 그리고 구매하거나 대출하세요.”

책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 건 밥 많이 먹는 걸 뽐내는 일과 비슷하다. 영양이 풍부한 책을 음미하며 읽고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아니면 영적 비만에 걸릴 수 있다. 차라리 나는 읽었던 책 중에 좋은 책을 다시 읽으라고 권한다. 예전엔 몰랐던 걸 발견하는 기쁨이 적지 않다. 돈키호테와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난 후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어릴 땐 못 맡은 그 사람의 향기가 나이 든 나를 확 끌어안는다.

안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도 한다. 나이 얘기다. 공자님이 예순을 이순耳順이라 했다는데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웬만한 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배웠다. 정작 내가 이순이 되었는데 그 말이 내겐 안 맞는 것 같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아서다. 그래서 그냥 남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걸로 이순을 해석한다.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다.

<돈키호테>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혀를 묶어두려고 하는 건 넓은 들판에 문을 달겠다는 것처럼 바보짓이야.” 이제 나는 ‘이순’을 ‘2순’으로 쓴다. 나이 든 자에게 필요한 두 개의 순. 유순(온순)과 단순. “너희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든 자유다. 난 화내거나 대꾸하지 않을 거다. 복잡하게 살아서 좋은 게 뭐냐? 곰곰이 생각해라. 해 질 무렵 알게 될 거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신문을 펼치니 ‘왜 저러고 살지’ 하는 사람들이 1면부터 쫙 깔렸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 모습을 보니 옛말이 포근히 와 닿는다. 흥분하지 말자.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넓은 들판에 문을 달려고 하는 바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눈물 짓고, 타인의 삶을 곁눈질하며 한숨 짓는 인생이란 얼마나 불행한 것일까요? 인생이라는 평균대에 올라 이상과 현실, 환상과 착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강의와 글을 통해 ‘행복’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전파해온 주철환 교수는 동북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MBC에서 PD로 일하며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과 소통했습니다. 그 후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OBS경인방송 사장과 JTBC 대PD를 거쳐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저서로는 <청춘>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연이 모여 인생이 된다>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