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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8월 블루문 (김홍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0 “차로 한 30분 가면 썩 좋진 않지만 산장이 있어. 거기 가서 잠시라도 눈 좀 붙일래?” 프로덕션 페가수스Pegasus의 프로듀서인 에이나르Einar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름도 생소한 나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도 자동차로 4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산정호수에 우리는 광고 촬영을 위한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그 ‘우리’에 황인종은 나 하나였고 미국에서 온 촬영팀과 현지에서 일을 진행하는 아이슬란드 스태프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지구상에는 존재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없는 나라,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여행 목록에 넣지 않을 나라 아이슬란드에 그렇게 내가 가 있었다. 2004년 7월이었다.

1 촬영은 저녁 7시부터 얼추 밤 12시까지 진행됐고 일출을 찍기 위해 다음 날 새벽 4시부터 스탠바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워낙 오지였기에 변변한 숙소도 없었다. 촬영 차에 딸려 온 바퀴 달린 캐빈에서 사람들은 어정쩡하게 남은 시간 동안 어정쩡한 새우잠을 청해야 했다. 에이나르는 동양에서 온 손님에게 잠시라도 편한 잠을 자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있겠다는 나를 굳이 차에 태우고 산장을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우리는 여기저기 설치미술품처럼 놓여 있는 검붉은 용암 사이를 헤집으며 고원지대를 달렸다. 패스파인더를 타고 화성의 지표면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새벽 1시, 하늘엔 여전히 푸른 기운이 돌았다. 지평선 너머로 지는 듯하던 해는 푸른 기운을 하늘에 흩뿌려놓으며 지평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백야였다. ‘어때, 환상적이지?’ 에이나르의 회색 눈이 말했다. ‘이건 꿈이지?’라고 묻고 싶었다.

 

2 산장엔 방금 도착한 아이슬란드 스태프 몇 명이 추위에 움츠러든 몸을 녹이고 있었다. 7월 말이었지만 추웠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맥주 몇 캔이 돌고 에이나르가 튜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슬란드 노래냐고 물었더니 “이건 그냥 노래야”라고 대답했다. 아이슬란드인인지 한국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느껴졌다. 우리는 같은 사람인 것으로 족했다. 등불도 없이 촛불만이 겨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뜬다는 블루문이죠. 하늘이 약간 흐리긴 하지만 두 번째 보름달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잠 못 이루고 서성대는 나를 의식했던 것일까, 일행 중 홍일점이었던 아이슬란드 소녀가 주문을 외듯 내게 말하곤 방으로 사라졌다. 블루-문. 정적이 정적을 삼킬 것만 같았다.

 

3 그녀의 주술에 걸린 듯 나는 문을 열고 나섰다. 새벽 는개에 젖어 촉촉해진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콧속의 흡착판이 온몸으로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 2시, 하늘엔 2.72년에 한 번씩 나타난다는 블루문이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이미 백야에 넋을 잃은 나에게 블루문은 현기증을 더해줬다. 조금 정신을 차려보니 등 뒤에서 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낮은 산비탈 위에 허름한 울타리가 있었고, 한 무리의 말들이 힐끗힐끗 보였다. 나는 서서히 울타리 쪽으로 발을 옮겼다. 30여 마리 되는 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잠을 청하거나 서걱대며 풀을 씹고 있었다. 어느덧 나의 몸은 울타리를 넘어 무엇엔가 홀린 듯 낯선 동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블루문의 기운에 취했기 때문이었을까? 그 기운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이었을까? 어느새 나는 말의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의 작품이야.” 그 말의 진정성이 전달되었던 듯 내 품에 안긴 말은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낯선 이방인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은 이미 그의 잔등 위에 있었다. 안장도 없이 말의 맨몸 위에 올라탄 나는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모아 쥐었다. 말이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달빛을 타고 푸른 공기가 부서져 내리며 이마에 와 닿았다. 서서히 내 호흡과 말의 호흡이 일치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인간을 버리고, 말을 버리고, 지구란 별에서 각자 생명을 부지하고 있을 뿐인 피조물로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4 산장으로 돌아왔을 땐 새벽 3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말을 탔었다고 했더니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나도 믿을 수 없었다. 그날은 태어나 처음 말을 타본 날이었다.  


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이자 광고평론가인 김홍탁 님의기적 같은 이야기가 8월의 늦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줍니다. 살아오며 이토록 아름다운 경험을 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인종, 언어, 동물 등 온갖 경로를 통해 입력된 다채로운 정보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적은 또 얼마나 될까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쏟아내는 말이 모두 그가 말에게 건넨 말처럼 진심을 표현하는 도구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순간순간 기적 같은 일들이 펼쳐지지 않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