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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보여진다는 것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은 인간이 ‘시각적 주체’라는 것에 대체로 수긍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인간이 육체라는 물질성과 공간성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물질이나 공간은 늘 타인 의 눈에 노출되어 ‘보여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가 시각적 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없어 보이면 지는 거다’ ‘약해 보이면 죽는 거다’와 같은 이 시대의 유행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가난하고 약한 것도 서러운데 ‘없어 보이면 지는 거다’ ‘약해 보이면 지는 거다’라니 없어 보이지 않으려고,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무리하게도 발버둥을 치는가? 요는 그 대상의 진실이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이 ‘~하게 보이면 ~한다’라는 것이니 타인의 시선에 ‘~하지 않게 보이기’가 인간의 최고 목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시각적 쾌락을 넘어서 우리 시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시선의 강박증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평가’의 범람과도 관계가 있다. 정치인이 여론조사라는 임시 평가를 수시로 받듯이 혹은 교수가 학기 말에 강의 평가를 받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일터에서는 평가의 붐이 일어나서 하다못해 집에서 에어컨 필터 하나를 교환하거나 인터넷 연결을 새로 해도, 카센터에서 자동차 수리만 조금 받아도 그 회사에서 쪼르르 전화가 걸려온다. AS 기사의 서비스에 만족했느냐는 것인데 그런 평가 제도 때문에 국가적으로 서비스 수준이 향상된 면도 있겠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은 때도 있다. 평가란 어떤 경우 왜곡될 수도 있는데 막 바로 자기 뒤에서 무엇을 캐는 것 같은 인간적인 모멸감을 받을 수도 있다. 인간을‘보여지는’ 존재성으로만 강박적으로 몰아세우면 인간성은 오그라들게 되고 타인의 시선에 전전긍긍하는 존재로만 위축되게 된다.

그런데 ‘보여지는 것’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살아가는 소수의 특권층도 있다. 무슨 노장 철학으로 무장한 자유인이거나 세속적 가치를 뛰어넘어 사는 예술가이거나 보헤미안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최고의 권력을 쥔 자나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가 자신이 ‘보여진다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볼 때 ‘보여진다는 것’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존재의 윤리성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숨기고자 해도 공인의 일은 보여지기 마련인데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보는 것만을 고집하여 독단적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쓴웃음을 짓게 된다.

힘 있는 자는 자신을 ‘보는 자’로 규정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서 동떨어진 독단자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힘없는 자는 자신을 ‘보여지는 자’로만 규정해서 지나치게 오그라들어 한없이 심성이 위축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보여짐 과잉 시대는 감시의 피로를 부르고 봄(seeing) 과잉 시대는 욕망과 주관의 독단을 부른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들이 도시 문명 생활에 지치고 삶에 전환점이 필요할 때 시골이나 산으로, 변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도 결국은 ‘보여지는 존재’의 피로감을 씻고 조금은 보는 주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인간은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여지는 타자라는 인식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지혜가 지금이야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며 살면 인생이 과연 피곤하기만 할까요? 내면과 외면이 오롯이 포개어지는 사람이라면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곧 자기 자신이니 인생의 피곤도 공허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남의 눈에 신경 쓰는 행위의 순 작용은 자기 자신을 항시 돌아보려는 자기 성찰이겠지요. 글을 쓴 김승희 교수는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자 유명 시인입니다. 1973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된 후 1979년에 첫 시집 <태양미사>를 필두로 지금까지 숱한 명작으로 우리를 지적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었으며, 시집, 산문집, 소설집을 넘나드는 무한한 작품 세계로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92년에 제5회 소월시문학상을, 2003년에 제2회 고정희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