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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핑 아티스트 박건우 중첩의 가치
박건우 작가는 마스킹 테이프로 예술을 한다. 얇은 테이프를 여러 겹 쌓아서 스니커즈와 명품 가방, 식료품 패키지 등의 오브제를 만들어낸다. ‘대체 마스킹 테이프를 얼마나 붙인거야?’ ‘이런 세세한 디테일을 구현하는 노하우가 있나?’ 난생처음 보는 유형의 작품을 접하며 마구 샘솟은 궁금증이 가시고서야 마스킹 테이프 조각을 연결한 접합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는 작가의 노고와 솔직한 감정이 겹쳐 있다.

박건우 작가는 사물의 형태감과 디테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물건을 직접 보며 작업한다. 책상 위 매킨토시Macintosh 역시 작업의 샘플로 참고하고자 구매한 것. 무려 미국 하버드에서 왔다.
박건우 작가는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무대미술학과에서 공부했고, 2019년 갤러리 스탠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이후로 매년 개인전과 그룹전을 포함한 다수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나이키, 페리에, 메이커스마크 등 여러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작업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테이핑 아트’로 활동하는 유일한 작가입니다. 마스킹 테이프를 작업 소재로 삼은 계기가 있나요?
무대미술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전역 후에는 건설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회사를 다니던 중 갑자기 갑상샘암 판정을 받은 거예요. 금방 복직할 줄 알고 사무실에서 짐도 안 뺐는데,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퇴사했죠. 멘털도 무너져 거의 1년 동안 방 안에서 한발짝도 안 나왔어요. 낮에는 그럭저럭 버틸 만한데, 해가 지면 시계 초침 소리마저 소음처럼 들려서 미칠 것 같더라고요.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계속되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책상 앞에 앉았는데, 서랍 속에 흰색 마스킹 테이프만 달랑 있었어요. 처음에는 책상 고무 매트의 눈금자에 맞춰서 1mm 오차도 없이 같은 길이로 마스킹 테이프를 계속 잘랐어요. 그러다가 방 안의 패스트푸드 포장지나 음료수병을 보며 그대로 만들기 시작했죠. ‘매일 하나씩 만들어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자’는 목표로 그 작업을 하다 보니 방 안에 쓰레기 대신 제가 만든 오브제가 쌓이기 시작했고, 갤러리에서 전시 의뢰까지 받았어요. 그렇게 수익을 올리면서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작가라는 타이틀로 활동을 시작하며 방 안에서도 나왔죠.

개인적으로는 작가님이 전북 익산에 있는 것도 반전이었어요. 작품에서 트렌디하고 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당연히 서울에서 작업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원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활동했는데, 서울살이가 익숙해지다 보니 집과 작업 공간의 분리가 필요하더라고요. 작업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위해 다시 익산으로 내려왔어요. 스케줄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가면 그때는 작업 오프off 기간이에요. 서울에서 사람들은 모두 바삐 움직이지만, 저는 그제야 조금 여유로워지죠. 요즘은 개인전을 앞두고 있어서 한두 달 정도 익산 작업실에 박혀 지냈어요.



지금 작업실에 있는 작품은 모두 붉은 계열이네요?
전시마다 ‘테이프 숍’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는데요, 이번에는 빨간색 사물만 모은 테이프 숍을 열어요. 빨강은 인류가 처음으로 지정한 색이에요. 호모사피엔스가 동굴에 그린 그림에서도 붉은색을 쓴 걸 볼 수 있잖아요. 생각해보니 제가 그동안 수많은 상품 패키지를 만들면서 가장 많이 본 색도 빨강이더라고요. 직설적 색이라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명확한 표현 효과가 있으니까요.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에도 빨간색을 쓰는 것처럼요. 저는 이렇게 상징적 의미가 담긴 대상이 좋아요. 한동안 나이키 스니커즈를 수집하고 작업 소재로도 삼은 것도 나이키가 신발 색깔이나 작가와의 협업 등 모든 선택에 의미와 이야기를 부여하는 방식이 매력적이기 때문이었어요. 요즘 빨강의 세상을 만들며 이 색이 지닌 상징을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매일 빨간색만 보다 보니 작업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감에 시달려요.(웃음)

마스킹 테이프로 입체 형태를 잡고 디테일을 표현하는 과정은 상상만 해도 까다로워요.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과는 분명 다를 텐데요?
사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드로잉 연습을 꾸준히 해둔 게 지금 작업에 도움이 많이 돼요. 드로잉과 커팅은 비슷한 점이 있거든요. 한번 칼을 대면 멈추지 않고 그어야 원하는 모양으로 마스킹 테이프를 자를 수 있어요.

마스킹 테이프를 겹겹이 붙이는 과정만 생각하며 작가님 작업도 일종의 명상이 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오히려 대부분의 과정에서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해야겠네요.
항상 작품이랑 싸우며 일해요. 손에 힘주어 칼질하느라 손가락 마디마다 염증이 생겼고요. 그런데 제 작업 과정이 너무 간소화되거나 쉬워지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 작업을 시작하던 그 마음을 잊으면 제 작품은 대량생산하는 기성 제품과 다를 바 없어지는 거죠. 저에게는 고통을 이겨내는 행위가 예술이에요. 그리고 저는 패키지 디자인의 글씨를 구현할 때도 완벽하게 똑같이 따라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삐뚤빼뚤한 손 글씨처럼 표현해서 수작업이라는 힌트를 주기도 해요. 작품이 딱딱하고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게 실제와 차이를 두는 거죠.


‘Heinz Tomato Ketchup’, masking tape on wood, 60×80cm, 2022
테이핑 아트 작업을 하면서 또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테이핑 아트를 하는 작가가 저뿐이라 가끔은 많이 외로워요. 호불호가 갈려서 이건 예술이 아니라고 보는 시선도 늘 존재하는데, 그럴 때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공생하며 이 테이핑 아트 신을 더 키우고 싶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색의 마스킹 테이프를 구해서 작업하고 있지만, 간혹 단종되는 경우가 있어 잘 쓰는 건 여러 개 구비해둬야 하고요. 요즘 인플레이션으로 마스킹 테이프의 가격도 올랐어요. 한 작품마다 마스킹 테이프가 보통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정도 쓰이니 작업이 더 신중해졌죠.

낱개의 작품을 활용하는 시도도 인상적이에요. 일상 사물들을 배송 상자 안에 담은 시리즈처럼요.
낱개로 만든 입체 작품이 많아지면서 페덱스FedEx, 디에이치엘DHL 등 각종 운송 회사의 배송 상자에 담아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원래는 하나만 만들어서 아트 페어에 출품했는데, 찾는 사람이 많아서 총 16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시리즈는 이제 만들지 않을 거예요. 잘 팔린다고 같은 스타일의 작품을 계속 만들면 당장에는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제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요.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에게도 실례가 될 수 있고요. 작업의 확장성을 찾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죠. 그 다음에는 냉장고나 수납장 안에다가 낱개 작품을 넣는 시도를 했거든요. 언젠가는 테이프 숍이라는 이름처럼 실제 공간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끊임없이 변화할 방법을 찾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죠. 개인전을 할 때마다 늘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는 이유입니다. 저에게 개인전은 브랜드의 뉴 시즌 패션쇼 같은 의미라, 그 자리를 통해 내년에는 어떤 스타일의 작업을 할거라는 방향성을 제시해요.


2021년에 주목을 받은 작가의 택배 박스 시리즈 중 ‘FedEx’.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정체성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나요?
작업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작품 사이즈를 키웠어요. 찌그러진 캔과 같이 복잡한 조형적 형태를 표현하는 것도 해보고 있고요. 이전에는 마스킹 테이프의 겹쳐진 부분을 강조하고 싶어서 LED 조명으로 작품을 비추곤 했는데, 요즘은 빛 없이 테이프 자체의 질감을 살리는 걸 좋아해요.

서랍 속 마스킹 테이프로 일상 사물을 재현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든 모습에서, 창조 활동의 시작점과 그 범위를 생각해보게 돼요. 앞으로는 테이핑 아트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가요?
마스킹 테이프는 과거의 저와 비슷해요. 그 당시에도 마스킹 테이프의 쉽게 찢기는 물성에 동질감을 느낀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작업에 ‘밸류 오브 오버랩Value of Overlap’이 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약한 것이라도 계속 쌓이면 견고하고 단단해질 수 있다는 속성이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 작업은 테이프 아트가 아닌 테이핑 아트로 불러야 해요. 앞으로도 테이프를 겹겹이 쌓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며 계속 작업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2022년 키아프 플러스에서 선보인 작품들. 마스킹 테이프로 찌그러진 포장재와 부서진 과자조각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박건우 작가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본 누에고치 만드는 장면이 떠올랐다. 누에는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얇은 실을 감고 또 감아서 집을 만든다. 도자를 빚듯 마스킹 테이프를 여러 겹 쌓아 완성한 박건우 작가의 작품도 겉모습이 알록달록하고 강렬하지만, 그 속 빈 공간에는 침체기를 지나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과거의 감정은 현재를 이끄는 동력으로 남았어도 작업 속에는 여전히 솔직한 진심이 담긴다.

개인전을 앞두고 밤새워 작업하느라 반쯤 풀린 눈을 하고도 작업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여러 번 눈빛이 반짝이며 깨어나는 모습을 보며 그런 확신이 들었다. 테이핑은 그의 삶도 진행형으로 만들었다.


박건우 작가의 개인전이 열립니다. 섬세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마스킹 테이프로 재창조한 놀라운 오브제를 감상하고, 작가가 내년 작업을 이끌어갈 청사진을 확인해보세요.

〈TAPE SHOP[THE RED]〉
기간 11월 23일(수)~12월 17일(토)
장소 도잉아트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325길 9 B1)
시간 화~토요일 오전 11시~오후 6시
문의 02-525-2223

글 박근영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