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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재용 빛내는 것을 두려워 마
이것은 도넛donut이 아니다. 흙으로 빚어 구운 표면 위를 걸쭉한 유약이 뒤덮고,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조각이 그믐날 별처럼 들러붙는다. 이것은 Do not이다.

김재용 작가는 웨스트하트퍼드 대학교 아트 스쿨 도자&조각과를 졸업한 후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도예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미국·중국·홍콩 등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고, 2020년 한국 첫 개인전 <도넛 피어>, 2021년 두 번째 개인전 <SHOOT!>을 열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도넛 작품은 흙으로 빚어 구운 뒤 화장하듯 그림을 그린다. 지름 1m 이상의 작품은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로 만들고 자동차 페인트로 도색한다. 코를 아무리 킁킁대도 빵 냄새가 나지 않는, 이것은 도넛이 아니다!
김양희 감독의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권태에 빠진 시인이 돌변하는 순간은 오직 도넛을 사러 갈 때뿐이다. 시상이 떠올랐나 싶을 정도로 눈빛이 퍼렇다. ‘함부로 아름다운 존재’인 도넛 가게 소년을 만나고 불현듯 찾아온 감정의 격랑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는 그의 아내가 도넛을 건넨다. “한번 먹어봐. 우울할 땐 단 게 최고야.”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수필집 구절 중에 이런 게 있었다. 도넛 만드는 사람, 그물 짜는 사람, 시인의 공통점은 “구멍을 뚫는 사람, 그래서 공기를 훔치는 사람”이라는. 쭉 핥으면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김재용의 도넛 조각. 상냥한 맛에 헛숨이 터지든, 설탕 속옷 뒤집어쓴 맛에 탄식이 터지든 그도 ‘공기를 훔치는 사람’, 맞다. 그 작품 앞에선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불현듯 감정이 파도친다.

지명도 높은 국제 전시를 열일곱 번이나 열고서야 2020년 학고재갤러리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연 김재용 작가. 실제 도넛 크기부터 1m 지름까지 1천4백72개 도넛 작품을 채운 전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작년 대구아트페어에선 최고 인기작으로 등극해 1백여 점이 3일 만에 동났다. 아이 방을 꾸미기 위해 구입하는 40대 부부가 많았다는 후일담도 들렸다. 매끈하고 반짝이는 그의 조각, 팬데믹 피로에 갇힌 이들의 가슴에 어떤 구멍을 뚫은 걸까?

‘호랑이와 까치’, ceramic, under glaze, cobalt oxide, glaze, swarovski crystals, 35×25×3.8(d)cm. 오른쪽 ‘아주아주 큰 노랑 버블 도넛’, F.R.P Urethane, swarovski crystals, 100×100×36cm.

색약이라고요?
고등학교 때 흙으로 만드는 작업에 재능이 있는 걸 알았죠. 그런데 입시 미술 학원 강사가 화실에 나오지 말라더군요. 빨간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적록색약이거든요. 당시로서는 한국의 미술대학에 들어가기 어려워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조각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서양화 전공 교수님이 회화를 권하더라고요. 어울리는 색, 편안한 색에 구애받지 않으니 자유로운 색, 시각을 자극하는 색을 쓴다는 거죠. 그래도 여전히 색은 내게 두려움이었어요. 졸업 후에도 어두운색 계열이나 흰색만 고집했죠. 지금은 총천연색 기쁨으로 빛나는 도넛을 만들잖아요.

미국에서 석사 학위 취득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가족을 부양할 생각에 요식업에 투자했다가 크게 실패했어요. 한 달 동안 도넛과 바나나로만 연명하며, 도넛이라도 팔아야 하나 고민했죠.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돈 욕심까지 생기면 작업을 포기할 것 같더군요. 도넛 대신 ‘도넛’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두려움을 긍정하기 위해,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흙으로 도넛을 빚고, 메이크업하듯 그림을 그려 넣고, 제한 없이 색을 섞었어요. 도넛이 색과 색을 조합해보는 실험 도구가 된 겁니다. 도넛이 수백, 수천 개 쌓이자 색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됐어요. 아, 내 약점이 결국 다 강점이구나, 싶은 순간이 오더군요. 그러고 보니 내게 색약은 축복이었네요. 한국 첫 개인전 제목이 였는데, ‘Donut’은 내게 ‘Do not’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자신에게, 그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죠.

“그의 <도넛>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발견했다. 행복을 꿈꾸는 이는 삶의 아름다움을, 삶에 지친 이는 위안을, 금욕적 삶을 기대하는 이는 도덕률을, 에로틱한 사랑을 꿈꾸는 이는 환상을 엿보았다.” 미술비평가 조새미의 글처럼 그의 ‘도넛’은 누군에게 자신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빵집 사장도 도넛의 동그라미는 메울 수 없는 법이다. 열심히 도넛 고리만 만들 뿐. 그의 ‘도넛’ 세상에도 완벽한 미, 충분한 위로, 무결한 도덕률, 순수한 에로스란 없다. 동그라미, 네모, 하트 모양 그림틀로 딱 그만큼만 보이는 아름다움, 위로, 도덕률, 에로스일 뿐. 그래서 그의 ‘도넛’은 위험하다.


카펫, 까치호랑이, 유니콘이 그려진 ‘도넛’이라니요!
동양과 서양에서 자랐거든요. 토목공학도 아버지를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유년기를 보냈어요. 여인의 차도르 속에서 빛나던 유색 보석, 무어풍의 장식 문양, 반짝이는 사막 모래…. 사람들이 무엇에 마음을 빼앗기고, 무엇에 소유욕이 동하는지 알아챘죠. 이후 한국과 미국으로 옮겨가며 살았는데, 사실 아랍인이 되기도, 미국인이 되기도, 한국인이 되기도 충분하지 않은 ‘전 지구적 이방인’이었죠. 반대로 말하면 범세계인. 각종 문화권의 신비로운 동물이 ‘도넛’ 위에 등장할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청화백자처럼 보이는 ‘도넛’은 무엇이죠?
그 답도 “동양과 서양에서 자랐거든요.” 한국에 돌아오면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청화靑華였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 실험에 박차를 가했고요. 내 작품의 제작 과정은 엄밀히 말하면 동양의 청화백자보다는 네덜란드의 델프트웨어에 가깝습니다. 동양 청화는 고령토를 쓰는데, 내 작품은 델프트웨어처럼 저화도 흙으로 성형하니까요. 물론 마지막엔 동양의 청화 유약으로 그림을 그리죠. 말하자면 ‘범세계적 블루 앤드 화이트’라 할까요? 하이브리드!

공격을 막는 보호막을 지니지 못했으나 그 대신 문화적 다양성을 즙처럼 빨아들이는 특수한 감각 지각을 얻었다. 그가 해외에서 먼저 지명도를 쌓은 이유는 그것이다. “내 작품을 전시한 지역과 국가를 살피는 일, 곧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항로”라는 그의 말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심지어 달팽이가 도넛 슛을 쏘던데요!
정착지 없이 여러 나라를 옮겨 살아온 나, 집을 짊어진 달팽이. 달팽이는 내 분신입니다. 숨어 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어딘가 끝없이 가고 있는 것도 닮았고요. 2001년부터 작품에 달팽이 모티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대구 신세계갤러리에서 3월 1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SHOOT!>에서 이 달팽이가 활약 중입니다. 집을 짊어진 채 과녁을 향해 도넛을 쏘아대는 달팽이, 누군가의 목표물이 되어 과녁에 매달렸으나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아 보이는 달팽이…. 작년에 특별히 힘들었던 대구 사람들이 올한 해 특별히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눈 질끈 감았다 뜨고 힘차게 도넛 슛을 날리는 달팽이처럼 말이죠.

그의 ‘Donut’은 정말 ‘Do not’인가? “겁먹지 마. 용기 내서 가봐. 네 모습을 드러내봐.” 꼬드기는 저 미끈한 도넛 말이다. 아니, 저 ‘Donut’은 자신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선악과일지도 모른다. 미끈한 도넛이 속삭인다. “한번 먹어봐. 우울할 땐 단 게 최고야.”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