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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선두 느리게 걸으면 보이는 것들

김선두 작가의 가락동 작업실. 아교물에 갠 분채를 장지에 수십 번 덧칠해 색을 낸다.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화사하면서도 깊은 색채가 조각보와 우리 민화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1958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한국화가 김선두는 중앙대학교 한국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중앙대학교 한국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금호미술관과 박여숙화랑, 학고재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중앙미술대전, 석남미술상, 부일미술대상, 김흥수 우리미술상을 수상했다. 내년 초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최할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느린 풍경 - Blooming’, 장지에 색연필, 분채, 65×144cm, 2015
참으로 온화하고 정겹다. 한국화가 김선두의 사람됨과 그가 그리는 우리 자연의 풍경이 모두 그러하다. 뾰족한 직선 대신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그린 여유로운 들판에서 사람과 자연은 하나 되고, 장지에 물과 아교에 갠 분채를 수십 번 덧발라 내는 색은 화사하면서도 깊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다”며 갓구운 고구마와 차를 내오는 그의 손길이 무척 익숙하다.

풍경 밖 곡선
“그림 그리고, 학생 가르치고,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느라 무척 바쁘게 지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죠. 내가 너무 직진만 하면서 살고 있구나, 삶에 여백을 두어야겠구나, 곧게 난 길을 차로 달리는 대신 논두렁이나 숲속 길을 천천히 걸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으로 ‘느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직선이 아닌 곡선의 삶, 그리고 풍경. 빠른 속도로 직진하던 자동차에서 내려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천천히 걸으니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온갖 자연의 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 물결 소리…. 김선두 작가의 대표작 ‘느린 풍경’ 연작에서 곡선은 자유롭게 화면을 가로지르다가 때때로 풍경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오기도 한다. 그는 풍경 속에 잠시 멈추어 너울거리는 곡선에 풍성한 자연의 소리를 담는다.

‘별을 보여드립니다 - 참새’, 장지에 분채, 130×98cm, 2018
김선두 작가는 전라남도 장흥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동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산과 들, 푸른 바다 풍경이 조각보처럼 화려한 원색으로 펼쳐졌다. 초등학교 1학년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로 삼각형을 반복해 그린 바다 너머 산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데뷔 초기에 포장마차와 서커스, 지하철 등 도시 주변부의 인간 군상을 현대적 인물화로 그리던 그는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고민하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남도 풍경으로 회귀했다. 그에겐 눈에 보이는 거리보다는 가슴에 와닿는 감정, 땅과 자연의 기운이 더 중요하기에 김선두 작가의 풍경화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구분이 따로 없다. 사람보다 들풀, 들꽃을 몇 배 더 크게 그리기도 한다. 우리 민화에서 보던 천진스럽고 엉뚱한 동물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밭두렁과 이랑ㆍ고랑으로 나뉜 논과 밭, 들판의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원색을 사용한다.

명사와 형용사로만 쓴 시
‘느린 풍경’ 연작에서 곡선으로 소리를 표현했다면, 3월호 표지작 ‘화가의 눈’은 눈으로 향기를 맡는 그림이다. “어느 겨울인가 고향 내려가던 길에 달리는 차 안에서 멀리 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이렇게 추운 날에 꽃이 피었네, 향기도 참 좋겠지, 그럼 그 향기를 눈으로 맡아볼까? 생각했지요.” 김선두 작가는 멀리 떨어져 코에 닿지 않는 향기를 눈으로 음미하고 그림으로 그렸다. 화가의 눈으로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적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은 제목으로 시도 한 수 지었다. “그는 향기를 눈으로 음미하지/ 지난날의 먼 향기까지.” 김선두 작가는 시 쓰기를 즐긴다. 생각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 그림에 담기 위해서다. 모호한 삶을 자유롭게 담아내는 시와 그림은 둘 다 어렵기에 매력적이다. 그래도 그림이 더 어렵다는 이유가 재미있다. “시는 동사를 쓸 수 있으니까요. 명사와 형용사로만 시를 쓸 수 있겠어요? 그림 그리는 일이 그와 같습니다.” 글과 가깝기에 문인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그의 화집에는 문학평론가 이윤옥, 정과리 등의 글이 실려 있고, 그중에서도 동향인 소설가 故 이청준 선생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1985년 전래 동화를 각색해서 펴낸 소설에 삽화를 그리며 만나, 열아홉 살 나이 차이에도 오랜 세월 가깝게 지내온 선생은 고향 선배이자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자세를 알려주는 스승이었다. 지난 2004년에는 역시 동향인 김영남 시인과 세 명이 함께 장흥을 답사하고 산문과 시, 그림으로 고향을 그린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전통의 경계에서 벗어나 콜라주ㆍ유화 등 다양한 서양화 기법으로 표현의 영역을 넓히고 지속적으로 한국화의 현대화를 도모하는 것 역시 이청준 선생의 영향. “새로운 주제는 없다. 깨달음이 있을 뿐.” 그림에 표현할 주제를 고민하던 그에게 생전의 선생이 건넨 이야기다.

한국화의 두 가지 전략
“결국 문학은 스타일이 바뀌어온 역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중요한 건 작가가 깨달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리 보면 우리도 서양화와 한국화라는 틀에 갇힐 이유가 없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을 새롭게 표현하는 한편, 한국화의 감각을 새로운 재료와 매체로 표현해야 합니다. 한국화에는 실험할 여지도, 가능성도 무궁무진합니다.” 김선두 작가는 앞으로 한국화의 필법으로 캔버스에 유화 작업을 하고, 스마트폰으로 찍은 풍경으로 이미지 작업을 하는 등 표현 영역을 한층 넓혀갈 계획이다. 형식과 매체가 변해도 그림 속 자연의 소리와 향기는 영원할 것이다. 이른바 오늘의 산수화. 비워서 충만하고, 느려서 더 풍성한 ‘느린 풍경’은 김선두 작가가 평생을 지속할 작업이다.

Interview
학고재 갤러리 우찬규 대표

옛것을 배우고 익혀 만들어낸 새로운 그림



학고재 갤러리는 고서화 전문 화랑으로 시작해 현대미술로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전시 작가를 선정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학고재는 ‘옛것은 창조의 샘이요, 어머니의 젖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에 대한 인식이 깊고, 동시대를 선도하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려 합니다.

김선두 작가의 작업에 주목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00년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처음으로 연을 맺었습니다. 동양화 기법에 작업의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갖춘 작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술 애호가에게 김선두 작가를 어떻게 소개하나요?
투박하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풍경을 수묵 채색으로 화폭에 담아내는 작가입니다. 고향의 대지를 기교나 형식이 아닌, 진솔한 이야기로 전달하고자 노력하지요. 삶의 온기와 소소한 인간사를 서정적으로 그리되, 현대적 방식으로 한국화를 다채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988년 개관한 학고재 갤러리의 역사가 30년을 넘었습니다. 다음 30년을 어떻게 계획하나요?
화랑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해 나가려 합니다. 더이상 미술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좋은 작품을 쉽게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합니다.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