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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봉태 원색은 상자도 춤추게 한다
선명한 원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상자의 즐거운 춤. 천장이 유난히 높은 평창동 작업실에서 표지작 ‘춤추는 상자’를 그린 김봉태 작가를 만났다. 그림만큼 유쾌한 팔순의 화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했다.

김봉태 작가는 책상 위에 여러 점의 신작을 펼쳐두고 동시에 작업한다. 작품을 완성하는 시간은 크기보다 색에 달렸다. 원하는 색상이 나올 때까지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다시 칠하다 색이 딱 맞을 때! 그 순간이 작업 과정 중 가장 기쁘다.

밝은 원색으로 각 면을 칠한 상자가 마치 춤을 추듯 서 있는 ‘춤추는 상자’ 연작 앞에선 누구라도 유쾌해진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선 중앙홀에 ‘춤추는 상자’를 5m 크기로 확대한 대형 조각을 세웠다. “아이들이 상자 옆으로 와서 깔깔 웃으며 팔과 다리를 들어 상자의 동작을 흉내내더군요.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됐다’ 싶었죠.” 

‘축적’, 플렉시글라스에 아크릴 물감과 색 테이프, 100×100cm, 2015

우리 나이로 여든하나, ‘원로 화가’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김봉태 작가는 천장이 유난히 높은 평창동 작 업실에서 여러 점의 신작에 교대로 색을 칠하느라 아주 분 주했다. “하나 칠하면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사이 에 다음 것 칠하고, 또 다음 것 칠하고… 그렇게 너댓 작품 을 항상 동시에 작업합니다.” 목소리는 다소 거칠지만 분명 한 어조와 맑은 눈빛, 이야기 중간중간 터뜨리는 유쾌한 너 털웃음…. 김봉태 작가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득 그의 나이를 잊게 된다. 

1963년 박서보, 윤명로 작가 등과 함께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한 김봉태 작가는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한 국제조형 미술협회 심포지엄에 초대받은 일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 갔다. 교육자로, 작가로, 한미 작가의 교량 역할을 하는 갤 러리 관장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던 그는 20여 년 만에 한 국으로 돌아와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한 후, 작업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전업 작가로 나섰다. 김봉태 작가는 색면 회화로 한국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 원색에 가까운 밝은 색채와 기하학적 조형이 두드러지 는 그의 작품은 모노크롬 화법을 주로 사용한 동 세대 한 국 작가의 작품과 사뭇 다르다. ‘그림자’ ‘비시원’ ‘창문’ ‘춤추는 상자’ ‘축적’ 연작으로 이어지며 50년 넘게 펼쳐온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 대규모 회고전을 지난 2016년 국립현대 미술관 과천관에서 열기도 했다.

밝은 원색으로 각 면을 칠한 상자가 마치 춤을 추듯 서 있 는 ‘춤추는 상자’ 연작 앞에선 누구라도 유쾌해진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선 중앙홀에 ‘춤 추는 상자’를 5m 크기로 확대한 대형 조각을 세웠다. “누 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상자 옆으 로 와서 깔깔 웃으며 팔과 다리를 들어 상자의 동작을 흉 내내더군요.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됐다’ 싶었죠.” 어디에나 있는 상자를 춤추게 만든 사연이 궁금 했다.

“어느 날, 예전 로댕 갤러리에 가서 로댕의 조각 ‘지옥 문’을 봤는데…. 어휴, 난 그렇게 괴로운 것은 참 싫어하거 든요. ‘삶을 좀 더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까?’ 생각 하며 집에 오다가 문득 슈퍼마켓 앞에 쌓인 박스가 눈에 띄 었어요. 버려진 상자들이 안쓰러워 보이더군요. 거기에 생 명을 불어넣고 싶었지요.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상자를 주 워다가 작업실에 가져다 놓고 관찰하며 놀았습니다.” 상자에 색칠해서 사람처럼 세워봤지만 종이로 만든 상자는 좀처럼 똑바로 서지 못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비틀어진 모습이 꼭 춤추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 모습을 드로잉으로 그리고, 거푸집을 만들어 구리로 조각을 만들다가 플렉시 글라스plexiglass에 아크릴 물감과 색 테이프로 완성하는 지금의 작품이 탄생했다.

“색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찾다가 예전에 플렉시글라스에 드로잉을 한 기억이 났죠. 처음엔 앞에만 칠했는데, 뒷면에 색을 칠해봤더니 반투명한 재질 때문에 마치 다른 색을 칠한 것 같은 부드러운 공간감 이 생기더군요.” 작가는 공간감을 더하기 위해 플렉시글라 스를 액자 뒷면에서 2cm 정도 띄워 그림자가 나타나도록 했다. 마냥 유쾌하게 보이는 ‘춤추는 상자’ 연작은 1년여에 걸친 다양한 시도와 발전 끝에 완성한 노작이다. 표지작 ‘춤추는 상자’(2010) 역시 그렇게 탄생한 작품 중 하나. 

‘춤추는 상자’, 플렉시글라스에 아크릴 물감과 색 테이프, 90×120cm, 2009

‘축적’, 플렉시글라스에 아크릴 물감, 440×200cm, 2013
최근의 ‘축적’ 연작은 자택으로 배달되거나 구입한 상자를 모티프로 한다. 상자라는 소재와 플렉시글라스라는 재료 는 동일하지만, 상자를 의인화해 유쾌하게 표현한 춤추는 상자와는 달리 새로운 연작엔 작가의 내밀한 일상을 투영 했다. “가만히 보니까 매일 집에 상자가 들어오더군요. 상 자 주우러 밖으로 돌아다닐 필요 없이 집에 들어오는 박스 만 가지고 작업을 해볼까 생각했죠. 이게 내 생활이니까. 약 상자도 있고, 물감 상자도 있지요. 처음엔 상자를 쌓아서 그려볼까 했는데, 지나치게 인위적인 느낌이라 작업실 계단에서 박스를 여러 개 떨어뜨렸어요. 그렇게 생겨난 형 태가 재미있더군요.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작품에 초콜릿 상자가 등장하기도 하고요.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걸 보 고 즐겁게 웃겠지요.” 

국립미술관에서의 회고전, 작가의 일생을 정리하고 되돌아 보는 대규모 전시를 끝낸 후에도 그는 식사하는 시간 외엔 늘 자택 지하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바쁘게 작업하고, 끊임 없이 변화를 모색한다. “작가로서 침체되어 있으면 거기서 끝난 거예요. 물론 나이 들어서 변화하는 일이 두렵기도 하 죠. 하지만 작업에 몰두할수록 욕심이 생겨요. 다양한 시 도를 하다 보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굴러가고, 작업하는 재 미가 생기죠. 요즘엔 영상 등 이제껏 해보지 못한 매체 작업 도 구상 중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유쾌하고 즐거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김봉태 작가. 우리의 삶을 보다 즐겁 게, 행복하게 만들 그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해본다. 

글 정규영 기자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