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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선이 깨지지 않는 시간

김선이 작가는 경희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국내외 3백 회에 가까운 초대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마이애미, 싱가포르, 일본 등 세계 곳곳 아트 페어에 30회 넘게 출품했다. 

‘용머리’라고 불리는 경주 남산 자락 아래 호젓하게 자리한 김선이 작가의 작업실. 한겨울 정오의 선명한 햇살을 그대로 품은 너른 마당에 다섯 살 난 잘생긴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ㄱ자로 놓인 아담한 작업실에 들어서자 김선이 작가가 평생 그려온 작품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100호가 넘는 작품부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드로잉까지, 작품의 면면도 다채롭다. “중학교 때까지 경주에서 자랐어요. 결혼 후 울산에서 살다가 경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기로 결심한 건 바로 이곳이 제 고향이기 때문이지요.” 작업실 한쪽 책꽂이에는 각종 미술 전문 서적과 함께 배가 불룩한 서류 봉투가 가득 꽂혀 있다. “<행복>은 20년 넘게 정기 구독했지요. 경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그 많은 책을 도저히 둘 데가 없어서 일일이 스크랩해 따로 모아두었어요. 지금까지 오랜 시간 작가 생활을 해오는 동안 <행복>을 보면서 영감도 받고 작품 구상도 했어요. <행복>은 내게 백과사전과도 같아요.” 

올해 예순일곱 살을 맞은 김선이 작가는 ‘닭 그림’으로도 유명하지만 원래 그의 작품 세계는 ‘도자기’에서 출발했다.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까지 경주에서 자란 그에게 ‘옛것’ 혹은 ‘문화재’라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조금 남다른 의미였으리라. “초등학교 1학년 때 경주시ㆍ군 미술 실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장래 희망을 화가로 정했어요. 방학 때마다 경주박물관에서 사학자 선생님들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모아놓고 문화재 강의를 했는데, 그때 박물관에서 토기와 도자기를 처음 제대로 접하며 그 매력에 이끌리게 되었지요. 도자기와의 첫 인연은 아마 그때부터이지 않을까 싶어요.” 김선이 작가는 도자기를 굽지 않는다. 그는 물감과 흙으로 도자기를 빚어 캔버스 위에 올린다.

‘바라보다’, 아크릴에 혼합 재료, 2015
흙을 고운체에 담아 고른 뒤, 아크릴물감과 섞어 캔버스에 밑 작업을 하고 그 위에 아크릴물감을 여러 번 덧입히면서 볼록한 입체감을 만드는 것. 마치 부조처럼 캔버스 위에 볼록하게 올려진 도자기의 질감은 매끈하면서도 투박하다. 그는 왜 도자기를 굳이 캔버스 위에 그림처럼 표현할까? “1987년부터 3년간 청자 도예가 故 김응한 선생님께 도자기를 배웠어요.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문득 ‘흙으로 그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신석기시대 토기부터 시작해 신라시대의 도자기를 지나 조선 청화백자에 이르렀어요. 6년째 청화백자를 3백~4백여 점 그렸는데, 지금까지 한 작업 중 가장 공을 많이 들였지만 그만큼 만족스럽고, 두고 보기에도 좋아요.”

김선이 작가는 희귀하고 가치 있는 문화재를 그림으로라도 옮겨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본격적으로 도자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자기를 캔버스 위에 올리면서 작업의 실제 모델인 문화재를 자기만의 방식대로, 자기만의 느낌대로 다시 표현해내는 것에 의미를 둔다. 지금까지 서른 번 넘게 일본, 미국, 싱가포르 등 해외 아트 페어에 참가했는데, 그때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바로 소재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흙으로 작업한 형태를 불에 구워낸 후 캔버스에 붙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작업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도자기 표면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제 작품은 절대 깨지지 않아요. 망치로 내려쳐도 깨지지 않지요.” 김선이 작가는 오랜 시간 도자기를 그리다 보니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어졌고, 그 과정에서 우리 선조들이 그린 작자 미상 그림인 민화를 10년 정도 배우기도 했다. ‘닭’ 시리즈를 비롯한 호랑이 등 동물을 테마로 한 작업도 민화를 배우며 모티프를 얻은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 도자기를 좋아해서 도자기 작업을 하고, 민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배웠다는 게 재미있지요? 민화만이 지닌 기교 없는 그 순수한 아름다움이 좋아요.”

‘조선시대 청화백자’, 아크릴에 혼합 재료, 2016 
최근 김선이 작가가 선보이는 ‘닭’을 테마로 한 다양한 작품도 이즈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닭’을 언제 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느냐고 많이들 묻지요. 15년 전인가, 단체전에 참가하기 위해 경기도 포천으로 차를 몰고 가는 길이었어요. 저 멀리 새까맣고 커다란 오골계 몇천 마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트랙터가 지나가면서
모이를 뿌리고, 그 커다란 오골계들이 이리저리 떼로 몰려 다니고…. 두 시간 가까이 차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어요. 그때부터 ‘닭’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올해는 ‘붉은 닭’ 해라지요?” 화려한 색감, 입체적 표현법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표지작 ‘바라보다‘는 일정한 두께의 나무 판 위에 고운체에 친 흙과 아크릴물감을 섞어 밑 작업을 한 후 아크릴물감을 올려 완성한 것이다. 김선이 작가는 거의 모든 닭 입체 작품을 한 쌍으로 만드는데, 그래서 지난해 개인전의 주제도 ‘바라보다’였다. 새해를 맞아 1월 15일까지 <김선이 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전>을 열고, 3월에 열리는 화랑미술제에서 닭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국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자기를 모두 다 화폭에 옮기는 게 꿈이에요. 지금까지 벌써 4백 점 가까이 완성했는데, 15년 정도 걸린 것 같네요.” 처음 붓을 잡은 일곱 살 때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기까지 한 번도 지치거나 외도하지 않고 한결같이 아티스트의 길을 걷는다는건 결국 그가 뼛속까지 아티스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나이 먹도록 끊임없이 그림에 몰두하면서 가장 힘든 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의 모든 것이에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항상 그림에 매달리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캔버스 위에 올린 ‘깨지지 않는’ 도자기의 몸통을 수백 번씩 쓰다듬으며 평생 동안 작업한 덕에 김선이 작가의 손가락 끝에는 지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흙과 물감을 벗 삼아온
김선이 작가의 거친 두 손, 자랑스레 펼쳐 보이는 그 열 손가락 끝이 그가 평생 만들어온 깨지지 않는 도자기의 희고 단단한 얼굴과 무척 닮았다.


김선이 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전
전시 기간 2016년 12월 23일부터 2017년 1월 15일까지
전시 장소 오매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35-4)
문의 070-7578-5223, www.omae.co.kr

유주희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