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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정경연 손에 손잡고

화가 정경연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섬유를 전공해 대학원을 마쳤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섬유미술ㆍ패션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6년 바그다드 세계미술대회 동상, 2008년 이중섭미술상, 2012년 대한민국미술인상 여성작가상, 2014년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호암미술관, 대림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과 일본 후쿠오카 미술관, 대만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미국 워싱턴 여성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정경연 작가가 2016년 신작 어울림을 프린트한 스카프를 두르고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다 결혼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국제전화도 마음 편히 할 수 없던 시절, 소포가 와서 열어보니 친정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목장갑이 한 박스더라고요.” ‘장갑 작가’로 알려진 정경연 작가 는 40여 년을 거슬러 장갑과의 첫 인연을 회상했다. 낯선 언어와 환경에 둘러싸여 공부를 병행해야 했던 딸에게 허드렛일을 할 때 쓰라며 어머니가 보내주신 목장갑은 그에게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의 ‘손’이 떠올랐어요.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거친 손,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백발 노인의 주름 많은 손, 청각장애인의 수화하는 손까지….” 정경연 작가는 그 감흥을 간직해 어머니에게 보낼 선물로 1976년에 첫 작품을 만들었는데, 지도 교수가 장갑을 소재로 본격적으로 작업해볼 것을 권유해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11월 29일까지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정경연 작가의 개인전은 지난 10년간의 작품을 대거 선보이는 자리다. “개인전은 오랜만이지요. 전시장에 걸려 있는 작품들 중에도 아홉 살까지 차이 나는 것도 있어요. 작품 하나 완성하는 데 시간과 공이 많이 들고, 수년씩 걸리기도 합니다.” 작가의 작품은 장갑으로 시작해 장갑으로 끝난다. 놀랄 만한 점은 작품에 사용한 장갑을 모두 주문 제작했다는 것. 시중에 파는 장갑을 사용하면 이음매의 단단함이나 표백제의 사용 여부 등에 따라 염색 과정에서 모두 다른 모양과 색이 나오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제 작품에 사용하는 장갑에 솜을 넣어주시던 세 분 중 한 분만 생존해 계세요. 벌써 여든이 넘으셨지요. 마음에 꼭 드는 장갑을 제작하기 위해 일일이 코바늘로 장갑을 떠서 공장에 가져가곤 했는데, 공장 네 곳 중 세 군데는 문을 닫았고 이제 한 공장만 남았고요. 세월이 오래됐군요.”

정경연 작가는 장갑을 네 개나 다섯 개로 면을 분할해 각각 염색하거나 물감으로 채색한 후 말리고, 다림질해 캔버스에 붙이고 고정하는 것을 반복해 작품을 완성한다. 염색을 마친 장갑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올을 풀어 다시 캔버스에 붙이기도 한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신작들은 캔버스에 아크릴 컬러로 장갑을 그린 뒤, 그 위에 염색한 실을 잘라 붙인 것이다. 염색한 장갑을 직접 캔버스에 붙인 기존 작업과 반대다. 채색 위에 금・은색의 반짝이 가루를 바니시와 섞어 칠한 화려한 면모의 작품들도 있다. 표지작 ‘어울림‘은 2013년 작품으로, 캔버스에 장갑을 붙이고 아크릴로 각각 채색해 완성한 것이다.

아크릴, 장갑, 핀셋, 붓, 먹, 종이, 브론즈 등 정경연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다양한 재료를 섞어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장갑을 주재료로 하기에 섬유 예술로 분류하지만, 장갑으로 화폭을 덮어 채색하고 설치 작업도 하니 조형예술이기도 하다. “저는 제 자신을 ‘잡티스트’라고 불러요. 제가 상복이 많은 편인데, 동ㆍ서양화의 장르 구분 없이 작업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동양화를 배웠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서양화를 배워 대학교 2학년 때 대학미전에서 서양화 부문 은상을 받았어요.”

‘블랙홀 08-45’, mixed media and techniques, lenticular cotton gloves on canvas, 145.5×112.1cm, 2008
그가 2008~2009년에 작업한 ‘블랙홀’이나 ‘어울림’ 시리즈를 보면 점ㆍ선ㆍ면을 흑과 백으로 둥글게 표현했는데, 마치 화선지에 먹이 서서히 번지는 듯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먹에 대한 향수가 있지요. 실제로 장갑 끝을 검게 표현할 때 먹을 찍어 바르기도 했어요.” 전시장에 걸린 작품 중 ‘블랙홀’ ‘어울림’ ‘하모니’ 시리즈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 제목은 ‘무제’다. “‘비어 있다 (empty)’는 뜻의 ‘무’가 아니라, 무한하다는 의미로 붙인 거예요. 관객 마음대로 명제를 붙여주길 원해서이지요.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무제> 전이 열렸는데, 여러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제 작품에 가장 많은 명제가 달렸다고 합니다. 어린 관객들이 가장 열심히 참여했다고 해요.(웃음)”

누군가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장갑은 우리가 손으로 하는 수많은 행위를 표현할 수 있는 수천수만 가지 표정을 지닌 제2의 얼굴이다. 정경연 작가는 평범하고 친근한 면장갑에서 일찌감치 이러한 특성을 발견해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흔들림 없는 작품 세계를 선보여왔다. “제 새끼손가락 굽은 거 보이세요? 의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손을 쓰면 점점 더 못 쓰게 되고, 1~2년간 쉬면 앞으로 10년은 손을 더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40년간 고생스러운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손이 늙고 못생겨져서 그걸 감추기 위해 반지를 끼곤 해요.” ‘늙고 못생긴 손’이라며 손을 감추는 작가의 얼굴에는 숨겨지지 않는 행복과 충만함의 기운이 번졌다. 그의 두 손이야말로 40년 세월 동안 꿋꿋하게 버텨온 작가로서의 뚝심을 증명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정경연 작가는 40년 전 이국땅의 딸에게 장갑 한 박스를 보내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장갑을 자르고, 붙이고, 칠하고 염색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 ‘손’의 표정을 세상에 대신 전하고 있다.

글 유주희 기자 사진 김규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