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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인섭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이인섭 작가는 1952년생으로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예총문화예술상과 제8회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미술문화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5회의 개인전과 인도ㆍ프랑스ㆍ스위스 등 해외 그룹전에 수차례 참여했다. 현재 서울미술협회 이사장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漁城田리. 인적 드문 산골에 한옥 두 채가 놓여있다. 이인섭 작가의 작업실이다. 서울에 집을 두고 서른이 갓 넘어 강원도 오지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유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전쟁 통에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고향은 개성, 어머니 고향은 평양인지라 방학 때면 친구들처럼 갈 수 있는 ‘할아버지 댁’이 없었지요. ‘시골에 간다’는 친구들 말이 왜 그리도 부럽던지…. 대학교 1학년 때 강원도에 살던 친구네 집에 놀러 간적이 있어요. 전기도, 연탄도 없는 시골이었는데, 홀딱 반해버렸죠. ‘언젠간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10년쯤 지난 후 한창 바쁘게 일하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우연이 찾아왔다. “예전 추억을 되살려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갔어요. 물가에서 한참 놀고 있는데 빈 한옥이 한 채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자리에서 그 집을 샀어요. ‘굴피’라고 부르는 참나무 껍질 위에 돌을 올린 지붕이 있는 집이었지요. 1년 후엔 그 바로 위에 있는 좀 더 큰 집을 한 채 더 샀고요. 그때부터 어성전에 정착하게 됐어요. 요즘도 1년에 9개월 정도는 이곳에서 지내요. 서울에도 집이 있지만, 이곳이 진짜 나의 집이지요.”

7월 첫째 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이인섭 작가의 개인전 <어성전의 사계-4년간의 그림일기>에서 선보인 작품들에는 어성전에서 그가 보고 느낀 사계의 변화에 대한 감흥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봄’을 주제로 한 작품이 눈에 띄었는데, 그가 유난히 봄에 그림을 많이 그리는 건 사계절 중 봄에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봄의 변화무쌍함이 좋습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장르 불문하고 작가들이 찾는 것은 바로 ‘변화’예요. 그중 가장 아름다운 변화를 찾아내는 게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작업실 앞마당에 있는 겹벚나무에서 팝콘이 튀어 오르듯 꽃이 피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우편함에 둥지를 튼 새가 낳아놓은 새끼 새들과 눈이 마주치거나, 잿빛 몸통에 연두색 눈을 지닌 어미 고양이가 새끼 다섯 마리와 함께 해바라기 주변을 맴맴 돌며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 또한 어성전 작업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이다. “이곳에 살다 보면 ‘아, 나는 이 자연의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구나’라는 것을 절감하게 돼요. 나무, 돌, 새, 흐르는 물과 내가 공존 하면서 자연의 일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서울에 살 땐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없어요.”

‘夏-猫’, mixed media on canvas, 53.0×45.5cm, 2016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새와 고양이가 주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면, 올봄에 그린 표지작 ‘시집가는 날’에 등장하는 새 두 마리는 상상의 동물이다. 우리 전통 민화에 등장하는 새에서 착안해 그린 것이다. 울퉁불퉁한 질감을 만들어놓은 흰 캔버스에 나뭇잎을 청색으로 그려놓고 보니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특유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이인섭 작가는 겨우내 밑 작업을 하기도 한다. “작업실 근처에서 구한 흙과 대리석 가루 등을 혼합해 캔버스에 칠하고 그 위에 다른 색을 덮는 과정을 수없이 거치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되었다고 느낄 때 바로 손을 떼요. 저 나름의 화폭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크기가 모두 다른 몇십 개의 화면을 만들어놓고 어떤 감흥이 찾아올 때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갑니다.” 농축된 감정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화폭에 완전히 쏟아 붓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내는 순간까지 감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그림에는 고뇌나 아픔의 흔적이 없습니다. 관객이 심도 있게 파헤쳐야 할 철학이나 사상도 없지요. 그림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끝을 정해놓고 계획해서 그리는 그림은 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30년 전, 이상향의 공간을 꿈꾸며 마음의 고향을 갖고 싶어 터를 잡은 어성전. 그곳에 살다 보니 그는 ‘자연’과 만났다. 젊은 시절 극사실주의 화풍을 따른 적도 있지만, 어성전에 터를 잡고 살면서 그는 자연이야말로 매 순간 기록하고픈 가장 훌륭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술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작가의 손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걱정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 듯,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림 작업에 임하고 싶다는 게 이인섭 작가의 삶의 철학이자 작품철학. ‘자연스럽다’는 건 자연에 보다 가까워진다는 뜻일 테다. “한동안 서울에 머물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날이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어요. 잠깐 동안의 서울 생활이 어성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한다고나 할까요?” 자연이란 그 자리에 있을 뿐, 우리는 자연을 소유할 수 없고 그 일부가 되어야만 자연을 누릴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그와 이야기 나누며 되뇌었다. 이인섭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몇 주 전 환기미술관에서 마주친 글귀가 떠올랐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김환기, 1973년 1월 8일의 일기)

글 유주희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