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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오명희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

오명희 교수는 1956년생으로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세종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동경예술대학 일본화과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일본에서 총 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LA 아트 페어, 도쿄 아트 페어, 마이애미 아트 페어, 홍콩 아트 페어, 시카고 아트 페어 등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어느 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창밖을 보는 데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에 휙 날아갔어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주변이 정지된 것처럼 고요함 이 저를 둘러싸면서 무아지경에 빠졌지요. 그 찰나가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오명희 작가는 검은 비닐봉지 대신 자신이 유난히 좋아하는 꽃무늬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는 풍경을 상상했고, 바로 화판에 옮겼다. 그렇게 ‘스카프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1992년 처음 스카프 연작을 전시했어요. 한 신문 지면에 쓴 작가 노트에서 저는 스카프를 가리켜 ‘그녀’라고 표현했지요. ‘그녀는 풀밭에도 눕고, 갈대밭에도 눕고, 나무를 희롱하고, 구름 위로 날아가고, 까르르 웃고….’”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스카프를 통해 그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작가로 살면서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일탈하고 싶던 젊은 시절의 꿈과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 자화상, 그 자체였다.

1992년 처음 스카프 연작을 발표한 이후 계속해서 스카프를 통해 작품 세계를 넓혀가던 오명희 작가는 동경예술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일본의 고미술을 접하게 됐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느꼈어요. 막연히 새와 나무와 꽃이 등장하는 화조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스카프 대신 새를 그리기 시작했지요.” 오명희 작가의 스카프 연작이나 화조화를 들여다보면 여름밤 들꽃 줄기의 솜털까지 느낄 만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갖가지 색을 많이 쓰지만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화려함’보다는 ‘서정성’에 가깝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모두 몹시 타는 편이에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지요. 스스로 ‘풀벌레 더듬이’ 같다고 느낄 만큼 계절을 타다 보니 제 그림에는 항상 계절이 뚜렷이 드러나요. 그 계절의 한순간을 포착해 그 안에 인생의 희로애락이나 애잔한 감상을 표현하는데, 그런 점에서 하이쿠와 제 작품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림에서 시적인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하이쿠를 좋아하는 저의 문학적 취향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인생을 통틀어 평생 동안 각인될 만큼 아름답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은 그 찰나. 지금 눈앞에 꽃이 피지만 언젠간 지고,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은 새가 곧 어디론가 날아가듯, 아름답지만 영원하지 않은 인생의 장면들을 다시 보는 것, 오명희 작가는 그런 관조의 시선으로 아름다움의 순간을 화폭에 담는다.

‘Wind on the Prairie’, oil on canvas, 130×162cm, 2013
표지작 ‘초원에 부는 바람(Wind on the Prairie)’은 2013년 작으로, 한국의 야생화가 가득 핀 들판 위로 날아가는 화려한 프린트의 스카프가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스카프 연작을 한지에 채색화로 표현했다면, 이 작품은 초원에 부는 바람을 따라 스카프가 날아가는 한순간을 캔버스에 유채로 표현했어요. 초원 위를 나는 스카프를 바라보며 이는 감흥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그 안에 숨은 주제는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이에요. 스카프에 그려 넣은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픈 갈망의 표현이지요.” 본래 동양화는 한지에 석채와 분채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지만, 그는 캔버스에 아크릴이나 유채로 작업하기도 한다. 최근엔 옻칠 작업도 시작했다. 예전부터 자개 작업을 계속해온 그이기에 언젠가는 옻칠 작업에 도전하고 싶었던 게 사실. 나무뿐 아니라 캔버스에도 옻칠 작업을 하는데, 옻칠 덩어리를 조각으로 만들어 옻칠한 캔버스 위에 붙이면 그대로 입체 스카프 작업이 된다.

쉴 새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 오명희 작가는 새와 꽃, 스카프를 그리며 자개와 옻칠이라는 ‘느리고 힘든’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가 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일이다. “누군가 내 작품을 보고 ‘오명희답다’고 느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내 안의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놓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는 것이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들어 부쩍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그는 잠을 아껴가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유독 반응이 좋았던 마이애미 아트 페어, 홍콩 아트 페어를 비롯해 올해 연말이나 내년 봄 즈음엔 런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를 앞두고 있다. “정말 꿈 같은 일이 일어난 거죠. 2013년엔가, 런던의 저명한 갤러리에 아시아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 말만 듣고도 가슴이 뛰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가슴이 벅찰 뿐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커피 잔을 내려놓는 그의 입가에 부르튼 자욱이 선명했다. 걱정 섞인 물음에 이내 미소가 돌아왔다. 자신감과 의지로 충만한 예술가의 얼굴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그의 앞엔 아직도 무수한 사계절이 놓여 있다.


#오명희 #초원에 부는 바람
글 유주희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