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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용일 그 많던 삶은 다 어디 갔을까

박용일 작가는 1963년생으로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93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2006년에는 국립고양미술스튜디오 3기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2014년부터 ‘He-Story’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남들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집을 지었죠. 1999년에 손수 지은 집입니다.” 서울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여 달려 고양시 원당동의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박용일 작가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대 중반이었던 그가 가로등조차 없는 외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복잡한 도시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아파트에 살기는 더더욱 싫었지요. 설계부터 자잘한 일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박용일 작가는 대학 졸업 후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 주변의 ‘풍경’을 포착한 그림을 그려왔다. 원래 ‘풍경, 바람’이라 이름 붙인 ‘어수선한 풍경’ 연작은 신도시 개발 지역 내 사람들이 옥수수를 심어 먹곤 했던 주인 없는 땅의 겨울 풍경을 그린 것이다. 색을 드물게 사용했고, 채도가 낮으며, 붓질이 다소 거친 그림들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일산 신도시 개발을 가까이에서 목격하며 사라져가는 풍경을 관찰하기 시작한 그는 2006년에 국립고양미술스튜디오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되면서 ‘종이배 풍경’을 작업했다. 이 역시 지금의 삼송 지구가 들어서기 전 철거 풍경을 담아낸 것이다. “고민 많던 대학 시절 아침 저녁으로 접하는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바로 몇 걸음 건너 이웃이 살던 집이 허물어지고,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서 있던 커다란 소나무가 저녁에 돌아오니 베인 모습은 그를 절박하게 만들었다. 충청남도 당진의 바닷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에게 무너지는 마을, 사라지는 풍경을 외면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He-Story’, oil on canvas, 91×117cm, 2014

지난 1월부터 3월 중순까지 훈갤러리에서 열린 초대전 는 그가 2014년부터 새로 시작한 보따리 연작 전시다. 평소 속도감 있는 작업 방식을 추구하는 그이기에 100호 작품도 일주일 안에 완성한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그림을 완성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까지의 과정이다. 각각의 보따리 안에 구현된 풍경과 사람, 사물은 작가가 직접 눈으로 본 것들이다. 가슴에 와 닿는 장면마다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그 사진을 천에 실사해 실제로 보따리를 묶어본다. 보따리 모양, 이미지와의 조화, 매듭 모양 등 상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따리 작업에서 그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덧칠’을 하지 않는 것. “대체로 한 작품을 시작하면 한 번에 끝내는 편입니다. 유화물감을 사용하지만 수채화처럼 맑게 표현하는 이유는 가볍고 얇은 천의 느낌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지요. 주제가 가볍진 않지만, 보기에는 예쁘면 좋겠어요.” 크기와 모양, 주름진 모습까지 저마다 모두 다른 박용일 작가의 보따리엔 골목길도 있고, 동네 사람의 뒷모습도 있고, 흐드러진 꽃나무도 있고, 시장통 풍경도 담겨 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과 타인의 삶을 묵묵히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의 시선이다. 우스갯소리로 불만이 많아 그렇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그것은 결국 휴머니즘이다. “맨 처음 보따리 작업을 시작할 때 백사마을과 교남동, 아현동의 철거 지역에 자주 가곤 했어요. 직접 가서 보면 정말 참담합니다. 슬프고 허망하지요. ‘전쟁’이라는 형태를 제외하고 이런 식의 일방적인 파괴가 자행되는 곳이 서울 말고 전 세계에 또 있을까요?” 이달 표지 작품 ‘He-Story’(2015) 역시 지난해 어느 철거 현장에서 주워온 꽃무늬 보자기를 보따리로 묶어 그린 것이다. 박용일 작가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보따리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신도시 개발, 아파트 건설 다 좋은데, 한 동네와 마을을 동시 다발적으로 허물어 쓰레기장으로 내간다는 건 단순히 물리적 파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방식, 가치관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이제부터 다른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거지요.”

지난해 뉴욕에서 전시를 하면서 각각의 도시를 주제로 한 보따리 연작을 구상하기도 했다는 박용일 작가는 당분간 보따리 작업의 완성도를 높여나가는데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릴 때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대학 입시 때도 조소와 회화 전공 사이에서 고민했으니까요. 보따리 연작도 입체적 형태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최근에는 보따리 안에 아무런 이미지도 그리지 않은 작업을 진행 중이다. 보는 사람이 저마다 보따리의 여백에 상상의 이미지를 그려 넣을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서다. 사람 사는 곳엔 어디든 이야기가 있으니, 박용일 작가의 ‘He-Story’는 우리가 함께 관통해온 사실적 역사(history)이면서 동시에 그 혹은 그녀이기도 한 우리 모두의 스토리(his story)이기도 하다. 그가 건네준 보따리에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내느냐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글 유주희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